고부농민봉기에 관하여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사발통문 봉기계획은 이러한 기반위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고부농민봉기 역시 이에 대한 실천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전봉준은 고부라는 지역적 조건과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가 자행되는 상황에서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고부를 뛰어넘어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왜 고부에서 일어났는가?
왜 !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는가? 그 답은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설명이 틀린 답은 아니다. 그렇다고 맞는 답도 아니다.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고부는 사람이 참 살기 좋은 곳이다. 역사기록과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보면 삼한시대 이전부터 고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고부는 자연지리적 조건이 매우 유리하였다. 고부는 지형적으로 전라도 서부평야지대와 전라도 동부산간지대의 접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에서 생산되는 물산과 문화를 모이게 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고부를 중심으로 한 장시 체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부는 동진강과 만경강을 기반으로 하여 광활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단일규모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평야지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지리적조건과 사회경제적 조건은 고부문화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 고부문화권의 형성
고부를 중심으로 경제권이 형성되고 통혼권(通婚圈)이 성립되었으며 생활의 단위가 됨에 따라 고부는 인근지역을 포괄하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부문화권의 형성은 행정체제로도 연결된다. 조선시대 고부군은 전라도 일대에서 전주부 다음으로 큰 규모라고 할 만큼 위세 있는 지역이었다. 조선초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이 종2품이고 현령이나 현감들이 종5품이나 종6품인데 반해 고부군수는 종4품이었다. 한때는 정3품 당하관(堂下官)인 통훈대부가 고부군수로 임명된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 이는 한편으로 수탈적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과거의 고부군민이 만만찮은 위상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부문화권의 형성은 고부민들에게 사고와 인식의 측면에서 공통성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악랄한 방법으로 수탈과 착취를 자행하였다. 『전봉준공초』 등에서 드러난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① 만석보(萬石洑) 아래 새로운 보를 쌓을 때, 고부군민들을 사역하면서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확이 많이 나는 논에 대해서는 세를 징수한 일
②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허가하면서 세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추수 때에 세를 징수한 일
③ 불효(不孝), 불목(不睦), 음행(淫行), 잡기(雜技) 등의 일로 죄목을 날조하여 고부군민에게 돈 2만 냥을 강제로 빼앗은 일
④ 태인 군수를 역임한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을 위한 비각을 짓는다고 천여 냥을 강제로 징수한 일
⑤ 대동미(大同米)를 징수할 때 1결(結)당 정백미(精白米) 16두씩을 돈으로 환산하여 징수하고 조선정부에는 질이 안 좋은 쌀을 사서 1결당 12두씩 상납하여 차액을 모두 착복한 일
⑥ 만석보를 쌓을 때, 백성 소유의 산에 있는 수백년 된 나무를 강제로 벌목한 일
⑦ 고부 경내에 집을 짓고 첩을 살게 하였는데, 집을 지을 때 백성을 사역하면서 요역을 시킬 때보다 더 심하게 닦달한 일
⑧ 계사년(1893)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고부 북부지역은 흉년이 들었지만 남부지역은 조금 수확이 있었는데, 조병갑은 전라감영에 보고하여 북부 4개 면의 세금을 탕감 받았으나 감영에서 세금 탕감을 승인받지 못하였다고 속이고 북부 4개 면의 전세를 남부에 배가하여 억지로 받아내고 북부에서는 전세를 남부로 전가하여 받아냈다고 공로를 과시하면서 농민들에게 무거운 보상을 요구하여 추가로 세금을 거둔 일
⑨ 풍년이 든 해에도 방곡령을 내리고 측근들에게 미곡을 매집하게 한 후 쌀값이 폭등할 때 이를 방매하여 폭리를 취한 일
이러한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는 당시 조선에서 만연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 강도가 특히 심한 것이었다. 당시 고부민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강도 높은 수탈과 착취과정에서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고부민들이 처한 자연지리적조건과 사회경제적 여건은 당시 조선의 다른 지역에 비해 좋은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큰 어려움 없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가 엄청난 강도도 진행됨에 따라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은 다른 지역 백성들보다 훨씬 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 전봉준의 치밀한 준비
고부문화권의 형성,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에 따른 고부민의 상대적 박탈감만으로 고부농민봉기가 왜 일어났는지 설명되지 않는 점이 있다. 그것은 누가 이를 기획하고 이끌어 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곳에 전봉준이 없었다면 고부농민봉기가 실현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전봉준은 1892년 교조신원운동 단계인 삼례집회 때부터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전봉준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의 변혁을 지향하는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그는 이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변혁을 모색하고 이를 실행해 나갔다. 사발통문 봉기계획은 이러한 기반위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고부농민봉기 역시 이에 대한 실천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전봉준은 고부라는 지역적 조건과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가 자행되는 상황에서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고부를 뛰어 넘어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국 고부농민봉기는 고부문화권의 형성에 따라 이루어진 고부민의 공통된 사고와 인식의 기반위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로 인한 고부민의 상대적 박탈감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조선사회의 변혁을 지향하는 전봉준의 치밀한 준비와 철저한 기획에 의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김은정․문경민․김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출판, 1995
홍금수, 「역사지리학에서 본 고부지역」, 『고부문화권의 재인식』, 정읍시, 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