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도를 대표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태홍
청암대학교 연구교수 성주현
동학에 입도하기까지
향암 유태홍(柳泰洪, 1867~1950)은 1867년 9월 2일 전라도 남원 이백면 주지봉(周智峯) 아래 목두리(木斗里)에서 아버지 유복렬(柳福烈, 1839~1879)과 어머니 순흥안씨(1838~1919)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광으로 중조 유자택(柳資澤)의 18세 손으로 누대에 걸쳐 남원에 세거하였다. 유태홍의 원명은 시홍(時洪)이고, 자는 사흥(士興), 호는 향암(香菴)이다.
유태홍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은 없지만, 범상치 않아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13세에 아버지를 여윈 유태홍은 청소년기를 어렵게 보내면서 조선말기 만연된 부조리에 적지 않은 불만이 있었다. 그러던 차 남원일대에 동학이 포교되자 1889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3년, 교조신원운동의 현장에서
동학에 입도한 이후 유태홍은 남원대접주 김홍기, 그리고 함께 입도하였던 김영기, 김종우 등과 더불어 동학의 포교에 전념하였다. 그로 인해 1889년 말경에는 수천 명에 달할 정도로 남원지역 동학의 교세는 크게 신장하였다. 2년 후인 1892년 동학교단에서 동학의 공인과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그해 겨울 전주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 유태홍은 남원지역의 동학교인 수백 명을 지휘하여 참여하였고, 전봉준과 함께 전라 좌우도를 대표하여 소장을 전라감영에 제출하였다. 이로 볼 때 삼례교조신원운동에서 전라 좌도를 대표한 유태홍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 1893년 정월에는 전봉준이 창의문을 지어 각 관아에 붙일 때 유태홍은 구례지역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태홍은 그해 2월 8일 광화문에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에도 참가하였다. 이어 보은에서 개최된 척왜양창의운동에도 참가하고자 하였지만 거리와 시간상 보은에 이르지 못하고 원평에 모여서 척왜양창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원평에서 보은으로 가려고 진산에 이르렀을 때 보은의 동학교인이 해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되돌아왔다.
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기포를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유태홍도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유태홍은 고부기포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 등으로 이어지는 1차 동학농민혁명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남원지역에서는 직접 동학군이 기포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호남 각지에 집강소가 설치되자 남원지역의 동학 세력은 보다 적극적으로 혁명 대열에 동참하였다. 김개남이 남원에 진주하면서 남원지역의 동학군은 폐정개혁을 단행하는 등 집강소 통치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유태홍 역시 동학농민혁명 대열에 적극 참여하였다. 6월 25일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은 오영(五營)을 두는 한편 성찰(省察), 통찰(統察) 등 수십 명을 두었는데, 유태홍은 김개남을 도와 동학 조직을 체계화하는 한편 폐정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민보군과의 대결
한편 동학농민혁명의 2차 기포 이후 김개남이 청주 방향으로 북상하자 유태홍은 김홍기 등과 함께 남원의 동학농민군 조직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에 그동안 동학세력에 눌려 있던 유생들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군 진압에 적극 나섰다. 민보군 조직의 중심지역은 운봉이었다. 운봉은 지리적으로 지리산 등 산악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서 호남과 영남을 잇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원의 동학군도 운봉 진출을 여러 번 시도하였다.
운봉에서는 여전히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에 대항하였다. 박봉양이 조직한 민보군은 운봉뿐만 아니라 함양을 비롯하여 진주, 산청, 안의 등지의 유생들도 참여하였다. 민보군은 10월 24일 남원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민보군이 3일 후 관속들에게 성을 맡기고 운봉으로 돌아가자 유태홍은 10월 25일경 남응삼, 이규순 등과 더불어 남원성을 다시 점령하였다. 남원성에 재집결한 동학군은 전세를 정비하는 한편 민보군과 관음치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치루었다.
남원성 전투와 그 이후
관음치 전투에 참여하였던 유태홍은 11월 14일 새벽 4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민보군과 치열한 일전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 전투에서 동학군 측은 이용구, 박중래, 고한상, 조한승, 황문경 등 주요 접주를 포함하여 2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유태홍은 동학군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수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1월 28일 운봉과 남원의 민보군이 연합하여 남원성을 공격하자 유태홍이 이끄는 동학군은 끝내 수성하지 못하고 성을 내주었다. 유태홍은 남원성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동학군 5백여 명을 이끌고 순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순천의 민보군에게도 패전하여 마침내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 유태홍은 유리걸식하면서 지리산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떠돌아다니며 은신생활을 하던 유태홍은 동학에 대한 탄압이 진정되자 1895년 가을 고향으로 돌아와 옛 동학 교인들을 찾아 교세를 회복하는데 진력하였다. 이후 유태홍은 천도교 남원교구를 설립하는 한편 3⋅1운동, 신간회운동 등 일제강점기 남원지역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