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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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가을 13호
고창, 순창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고창, 순창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동학농민혁명에서 무장기포는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고부봉기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인식하게 된 농민들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에 맞서 다시 한 번 일어서 동학농민군을 형성하였으며 포고문을 선포하여 혁명의 당위성과 그들의 의중을 전국에 알려 본격적인 혁명에 접어들게 된 시발점이었다. 반면 순창은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장면을 간직한 곳이다. 전봉준 장군이 피체되어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져버렸을 때 동학농민혁명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기에 끝이 있고,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다는 말처럼 이 두가지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현장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에 고창과 순창은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고장일 것이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폭염(暴炎)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계절이다. 사나운(暴) 불꽃(火) 두개가 타오르는, 그럼에도 생명의 약동이 가장 활발한 계절이기에 사나우면서도 아름다운(炎는 ‘아름다울 담’이라고도 읽는다.) 것이 바로 여름일 것이다. 하지만 연일 올해 최고기온을 갈아 치우는 일기예보를 보고 있자면 하는 수 없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구온난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인간이 지은 죄는 인간이 갚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 더위가 조금은 무뎌질까 생각하며 차에 몸을 싣는다.


  고창의 초입에 들어서면 ‘동학농민혁명의 성지 고창’이라는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리석을 네모반듯하게 깎아두고 그 위에 깃발을 줄지어 세워둔 것이 그럴싸하다.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이 많은 지역이며, 유적지 또한 잘 관리되고 있기에 답사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전망했다. 그러나 막상 선운사에 도착하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목을 잡는다. 초입의 주차장 이후로 차량의 운행이 금지되어 있는데다 입구에서 도솔암까지의 거리가 도보로 1시간 이상 소요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별 수 없이 도솔암이라 쓰인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걷기 시작했으나 30도 후반의 더위에 사실상 등산을 하다 보니 등줄기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 가져간 생수통의 물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겨우 도솔암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한국의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금동보살좌상 등 5점의 보물이 있으며, 기타 지방 문화재 등 총 1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급한 일정에 찬찬히 둘러보지 못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후에 한 번 더 방문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자위하며 도솔암을 지나쳐 마애불로 향한다. 마침내 마애불앞에 서자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힌다. 지상 3미터의 높이에서 시작되는 세로 5미터 크기의 마애불은 양각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듯 한 입체감으로 압도해온다. 명치부분의 네모난 흔적은 마애불의 전설에 대한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이 마애불은 3천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의 모습을 본딴 것으로 명치부분에는 신비로운 비결이 들어있으며,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나라가 망할 것이요, 망한 후에 다시 흥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비결과 벼락살이 함께 들어있어 그것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전라감사 이서구가 1820년 마애불 명치를 열어보니 소문대로 비결이 들어있어 이를 꺼내보려 하였다. 그러나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치는 것을 보고 첫 장만 재빨리 펼쳐보고 다시 봉해버렸는데 거기에는 “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후 1892년에 손화중 장군의 교구에서 그 비결을 꺼내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모두가 벼락을 두려워했지만 오하영이라는 도인이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을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을 것이라 하여 손화중 장군을 비롯한 동학도들은 석불의 명치에서 비결을 꺼내갔으며 이 일은 민중들이 물밀 듯이 동학에 입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가 사실이었는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런 소문을 들은 민중들은 동학을 일종의 구원자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며, 이는 2년 후 동학농민혁명이 그 시작을 알렸을 때 농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마애불은 커다란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무장기포지



  무장기포지


  마애불을 뒤로하고 다시 한 시간 가량을 걸어 내려오니 도리 없이 기진맥진해졌다. 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불안감도 들었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선운사에서 무장기포지 까지는 고창둘레를 반 바퀴정도 도는 먼 거리였다. 무장기포지 주차장에 들어서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라는 글귀가 음각되어있는 기념비가 맞아준다. 그 옆에는 동학농민혁명포고문이 한자로 새겨진 비가 보기 좋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안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니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 탑은 2002년 4월에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고창군에서 혁명의 참 뜻을 기리고 그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포고문을 선포하고 있는 전봉준 장군의 모습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그에 호응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탑의 상층부는 그들의 염원과 강렬한 의지를 형상화한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이다. 하단부에는 두루마리 형태의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기념탑의 주위를 빙 두르고 있는 하늘을 찌르는 듯 한 죽창모양의 조각은 농민군이 분연히 떨쳐일어났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기념탑을 바라보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좌측 조그만 언덕에 소나무 세 그루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이 세 그루의 소나무는 2009년 4월 25일 무장기포 115주년을 맞이하여 식재된 것으로 중앙의 소나무는 전봉준 장군, 좌측의 소나무는 김개남 장군, 우측은 손화중 장군을 상징한다. 기념식수 당시 전국의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등 20여 곳에서 가져온 흙을 합하여 심었다고 한다.


  무장기포지는 농민군들이 3월 16일부터 주둔하여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손화중 장군의 합세로 전국적인 농민혁명이라는 목표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 전봉준 장군은 주변지역의 농민군들을 무장 당산으로 집결시켰다. 사방에서 몰려온 농민군은 순식간에 4천여 명의 군세를 이루었고 이곳에서 훈련하며 관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짧은 머무름이 못내 아쉬웠지만 마애불에서 상당한 시간을 자체한데다 답사지가 꽤 남아있었기에 무장면에 위치한 무장읍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창의 외곽에서 시내로 차를 달려 무장읍성에 들어서자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안내판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성내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지 여기저기 흙무더기가 쌓여있고 인부들과 장비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장읍성은 태종 17년(1417)에 만들어진 것으로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진으로 삼았을 때 두 고을의 중간지점을 중심으로 삼고 이 무장읍성을 쌓았다고 한다. 무장읍성은 옹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두른 남문과 동문이 있었으나 현재 동문은 흔적만 찾아볼 수 있다. 내부에는 객사, 동헌 등 옛 건물이 남아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물리치고 1만 명 이상의 대군으로 세를 불린 농민군은 무장을 점령하고 수감 중이던 농민군들을 풀어주었으며 동헌 등을 파괴하고 군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다. 그리고 성 내외에 악행을 일삼던 아전이나 지주의 집을 불태웠다.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무장기포 출정식행사로 진격로를 걸어 무장읍성에 도착해 무장기포기념식을 치르고 있다.



▶ 무장읍성



  전봉준 장군 생가터


▶ 전봉준 생가터 시비


▶ 전봉준 생가터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 터가 있다. 2000년에 고창군에서 그 일대를 매입하고 생가를 복원하여 현재는 초가집 한 채와 곳간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전봉준 장군은 천안 전씨가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오던 고창 당촌에서 태어났다.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 전창혁은 서당 훈장 일을 하며 지내다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1855년 음력 12월 3일에 늦둥이 자식을 두었는데 이가 바로 전봉준 장군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어릴 때부터 체구가 작고 다부져 차돌맹이 같은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전봉준 장군의 생가 옆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노랫말이 새겨진 시비가 서있다. 백성을 위해 목숨 바쳐 봉건제도의 부정과 외세의 침탈에 맞서 싸운 전봉준 장군을 추모하는 이 노래를 앞으로도 모든 국민들이 배우고 또 부를 것이기에 우리는 전봉준 장군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본다.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전봉준 장군의 생가로부터 차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고창읍성은 모양성이라고도 하며 낙안읍성, 해미읍성과 더불어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조선시대 읍성 중 하나다. 특히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최근 보수공사를 통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황토현 전투 이후 고창을 점령한 농민군들은 고창읍성으로 들어가 옥에 갇힌 동학교도들을 석방하고 군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전봉준 장군은 규율을 엄격히 지키게 하여 농민군들이 백성들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고창읍성은 겉으로 보아도 수성에 좋은 조건임을 알 수 있었다. 고지대에 위치하여 성벽을 제외하고도 자연적인 방비가 갖추어져 있으며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입구부분에는 옹성이 둘러져 있고, 성벽을 따라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 만든 못)도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단단한 느낌을 받는다.


  이 성에는 성밟기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것이다. 꽤 그럴듯한 이야기다 싶은 것이, 1,700m에 이르는 성벽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다보면 다릿병이 나을 만도 하고 여러 번 걷다보면 자연히 좋은 운동이 되어 건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을 밟아줌으로서 성벽의 돌이 더욱 단단하게 아귀가 맞아 들어가 성을 튼튼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고창읍성에서는 음력 9월 9일을 전후로 모양성제가 열리는데 지금도 성밟기가 연례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성을 빙 둘러 밟아가는 모습은 무척 장관이라고 한다. 이곳을 방문한다면 성밟기를 해보며 조상들의 지혜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전봉준 장군 피체지


  고창읍성을 마지막으로 고창을 떠나 순창으로 향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보았으니 이번엔 끝을 볼 차례다. 우금치전투 이후 패배를 거듭하며 후퇴하던 전봉준 장군은 끝내 농민군들을 해산한 뒤 자신은 순창의 피노리에 거주하고 있던 옛 부하 김경천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헌병대에 인계되었으며 1895년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장군 등과 함께 한날 한 시에 처형되어 동학농민혁명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순창에는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피체지 유적비, 피체지 전시관, 전봉준 장군 동상, 그리고 전봉준 장군이 피체되는 장면을 형상화한 인형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전에 방문했을 당시에는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던 피체장면의 인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철거된 흔적만이 휑하다. 의아한 마음에 관리인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어보자 전봉준 장군이 피체되는 모습을 재현해 둔 것은 장군에게 누가 되는 일이라는 민원이 제기되어 이를 수렴하고 작년 가을에 철거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말이 그럴듯하기도 했지만 역사의 한 장면이 재현된 조형물이 사라졌다는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피체지 전시관은 실제 피체지에서 약 300m 가량 떨어진 냇가의 제방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조그만 돌벽과 무너져가는 집이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다. 피체지는 여러 나무들과 호박 넝쿨로 뒤덮여 그 모습을 찾기도 어려웠다. 주변정비와 안내문 설치가 시급하며 피체지 전시관이 실제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라 오해하는 관람객이 없도록 안내 표지판이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본다.


▶ 전봉준 피체 전시관 



▶ 전봉준 피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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