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대도소, 김개남 장군의 후손을 만나다
김개남 장군의 고손자 김호영

開(개)南(남). 김개남 장군은 남쪽을 연다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 남쪽, 즉 전라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그 세를 떨쳤다. 동학농민군들에게 누구보다 큰 버팀목으로 자리 잡은 그는 누구보다 민중을 위하고 한 치의 타협도 없는 곧은 이였기에 집권층은 그를 정식적인 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임의로 처형할 만큼 두려워했다. 지난 2010년 임실군 학암리에 김개남 장군의 실묘의 위치가 확인되어 8월과 10월 2차에 걸쳐 유해발굴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찾지 못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후대로 이어져 내려와 현재 장군의 고손자 김호영 님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방호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고조부의 뜻을 이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지키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 김호영 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답)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개남 장군의 고손자인 김호영이라고 합니다.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근무 중입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기념관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여 지원하였고 지금까지 2년 반 가량 근무해 오고 있습니다.
문) 고조부님에 대하여 주로 어느 분께서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답) 고조부님의 시제 때가 되면 조부님과 부친께서 고조부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곤 했습니다. 특히 부친께서는 고조부님의 후손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고조부님의 시제는 저희 집안에서 대를 이어서 지내오고 있으며, 시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문) 현재 정읍시 산외면에 거주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김개남 장군님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또, 묘역은 어떻게 조성되었습니까?
답) 저희 집안은 고조부님 때부터 계속 이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고조부님의 묘역도 이곳에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고조부님의 묘역은 제 부친께서 조성하셨는데 당시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 묘역 조성비를 마련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읍시청에서 재작년에 묘역 주변에 둘레석을 만들어주었고 제초 등 일부 관리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관리는 제가 도맡아 해오고 있습니다.
문) 그분들께서 해주신 김개남 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답)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조부님을 따르던 농민군 몇 천 명이 집 뒤의 터에서 3일 가량 묵어간 일이 있어 고조모님께서 그들을 위해 밥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고조부님께서 떠나가실 때 10리가량을 마중하고 돌아오신 뒤에도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한 농민군들이 남아있었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 외에는 고조부님의 일을 언급하길 꺼려하셨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집안에 화를 당하신 분이 계십니까?
답) 왜정 당시 누군가가 조부님이 김개남 장군의 후손이라 밀고하여 서에 끌려가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칫 큰일을 당하실 뻔 했지만 다행히 그곳에 아는 분께서 조부님을 대변해 주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주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때였지만 그때도 조상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다는 것을 신고하면 꼼짝없이 잡혀가야 했던 거지요. 부친께서도 성을 박씨로 바꿔 생활하신 기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더욱 고조부님에 대한 언급을 꺼리게 되지 않으셨나 생각합니다.

문) 2010년에 김개남 장군님의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성과 없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고조부님의 유해 발굴 작업은 임실군 학암리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제보로 고조부님의 유해 위치가 알려져 유해발굴팀이 구성되었고 2010년 8월, 10월에 두차례 발굴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성과없이 종료되었습니다. 3차 발굴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주도하여 발굴 작업을 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조부님께서 혁명을 주도하여 동학농민군을 이끄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그 분의 고손자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유족 분들이나 기념관을 찾아오시는 관람객 분들이 저를 처음 보시는데도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시는 일도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대 분들께서 고생하신 것에 대한 보답을 제가 받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죄송하고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고조부께서 남기신 유물을 보유하고 계신 것이 있으십니까?
답) 현재 최시형 교주의 사진과 손병희 선생님의 사진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최시형 교주님께서는 고조부님의 집에서 자주 묵어가실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물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고조부님께서 남겨두신 유물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증조부께서 그 유물들이 혹시 해가 될까봐 땅속에 묻어두셨다가 그래도 불안하셨는지 다시 파내어 불태워버리셨습니다. 고조부님의 유물이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증조부님의 판단으로 집안에 큰 해를 막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