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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가을 13호
중국 근세의 천년왕국운동 태평천국운동

  중국 근세의 천년왕국운동 태평천국운동


동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인문학부 교수

강문호


  현재의 부정적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종교적 이상향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민중혁명을 천년왕국운동이라 부른다. 정치‧사회적 혼란과 지배층의 수탈, 삼정 문란 등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이 끝나고 동학이 지향하는 이상향이 도래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에 근거해 발생했던 한국의 동학농민혁명이나, 기독교적 평등의식에 근거해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며 일어나 14년 남짓(1851~1864) 중국 강남지역을 통치했던 태평천국운동 등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운동의 발생 배경 역시 19세기 중엽 중국의 암담한 정치 사회적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1842년 8월, 영국과의 아편전쟁 패배 결과 체결되었던 난징조약은 중국 중심 세계관의 와해에 따른 사회적 당혹감과, 막대한 배상금 및 아편수입 증가에 다른 결제은(銀)의 유출로 사회 경제적 혼란을 불러 왔다. 아울러 태평천국운동의 발상지 양광(兩廣) 지역은 지역적 격리성과 다양한 종족의 잡거와 충돌, 경제적 궁핍, 인구의 급증과 경작지 부족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안, 문화적 낙후 등으로 인해 체제 부정 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 태평천국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중국 광동성의 빈농 출신 홍수전(洪秀全)은 지방의 과거 광주부고에 네 번 실패한 후 만인의 평등과 우상숭배 금지 등을 주장하는 기독교 서적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얻고 그에 근거하여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하고 지지자 규합에 나서는 동시에, 만인의 평등과 혁명정신을 강조하는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태평사회의 도래를 기원하는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사탄과 가진 자들의 잘못을 질책하는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등을 지어 배상제회의 이론적 기초를 완성하였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 건설을 모토로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정하고 광서성 금전(金田)에서 기의하였다. 그리고 1851년 9월 25일, 홍수전이 통솔하는 태평군은 광서성 영안(永安)을 점령한 후 제후왕을 봉건하고 관제를 제정하는 동시에 태평천력(太平天曆), 태평조규(太平條規)를 반포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했다. 이것을 ‘영안건제(永安建制)’라 부른다. 1853년 3월 20일, 태평군은 마침내 중국 강남의 정치 사회 중심인 남경을 점령한 후 ‘천경(天京)’이라 개칭하고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남경 정도 후, 태평천국은 공상적 사회주의 성격이 농후한 제반 제도를 입안,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사유재산 금지와 재화 공유원칙에 입각한 성고제도(聖庫制度), 토지의 균분(均分)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제반 제도 및 시책을 규정했던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의 반포 시행, 남‧녀 평등을 기초로 시행했던 부녀자의 과거(科擧) 허용과 수전(授田), 일부일처제 등을 그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제반 시책은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전통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이상세계의 건설은 바로 태평천국의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통시대의 유물인 사숙(私塾)을 금지하고 서원을 폐지하는 동시에 묘우(廟宇) 및 신상을 파괴하는 등 유‧불‧도 관련 각종 우상의 배격과 파괴 조치 등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남경 정도 2~3년 후 북진정책이 좌절되면서 진취적 혁명 의지는 사라지고 일부 지배층을 중심으로 편안 국면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치‧사회적 계급을 앞세운 봉건적 전통왕조체제로의 회귀 및 지배계층의 내분으로 이어졌다. 즉, ‘兄‧弟’로 호칭되던 태평군 상하는 ‘臣‧民’ 관계로 변했으며, 개국공신들은 귀족으로 행세했다. 아울러 축첩제 및 작위 세습제의 부활, 관원의 가마 사용 등이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했던 것은 태평천국 지배층의 내분과 분열이었다. 소위 ‘천경사변’이라 불리는 천왕 홍수전과 동왕 양수청(楊秀淸)의 충돌, 천왕 홍수전과 남왕 위창휘(韋昌輝)의 대립, 남왕 위창휘와 북왕 석달개(石達開)의 대립, 천왕 홍수전과 북왕 석달개의 대립 및 북왕의 조직 이탈 등을 거치면서 지도체제는 와해되었고, 그 결과 국력은 약화되었으며 구성원의 실망과 내분이 이어졌다. 비록 천왕 홍수전이 지도체제 정비를 위해 영왕 진옥성(英王 陳玉成)‧충왕 이수성(忠王 李秀成)‧간왕 홍인간(干王 洪仁玕) 등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국호를 바꾸는 동시에 홍인간의 정치적 이상론을 정리한 자정신편(資政新編)에 근거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제 방면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와해된 지도체제의 정비와 혁명 열기의 재점화는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태평천국은 1864년 6월 천왕 홍수전의 병사 후 호남성과 안휘성의 단련(團練)을 개편한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과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천경이 함락되면서 증국번에게 체포된 충왕 이수성은 태평천국 실패의 원인으로 군사작전의 실패와 지배계층의 내분, 천왕의 정치적 무관심, 인재 등용의 문제점 등을 꼽았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국가 통치 이념상 종교적 색채가 너무 강했다는 사실과, 천조전무제도나 자정신편 등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 제도는 호소력이 부족했다는 점, 봉건화 경향에 따른 구성원 및 민중의 이반, 태평군 내부의 지역적 대립과 반목, 지배층의 사치 향락, 증국번‧이홍장을 위시한 한족 관료 및 향촌 유력세력들의 청(淸) 지지 등을 실패 원인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봉건적 전통 질서를 거부하고 기독교 교리에 근거하여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태평천국의 꿈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정치적으로는 태평천국 진압에 공을 세웠던 증국번이나 이홍장 등 한족 사대부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군사적으로는 정규군인 팔기(八旗)와 녹영(綠營)을 대신하여 회군 등 사병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군벌의 출현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태평천국 진압 경비 마련을 위해 시행했던 화물통과세 징수 제도, 즉 이금제도(釐金制度)가 중화민국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어 경제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남녀 평등의식 고양 및 여성의 지위 향상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해혁명(辛亥革命) 등 그 이후의 국민혁명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손문(孫文)은 광동인으로 홍수전과 동향이었던 까닭에 그의 일대기에 익숙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태평천국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의 토지 균분사상은 손문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민생주의(民生主義)로, 태평천국의 만민평등사상은 삼민주의의 민권주의(民權主義)로 계승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태평천국운동은 종교적 이상향의 도래를 바라는 민중혁명, 즉 천년왕국운동이었지만 동시에 중국 근세 혁명의 기점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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