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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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16호
완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완주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추념의 장 (원경)




  대둔산 동학농민군 항쟁지




 

  동학농민군 본대가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던 때, 고산의 농민군 지도자 최공우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농민군은 대둔산의 형제바위에 진을 쳤다. 처음으로 농민군이 주둔했던 1894년 11월 16일 경에는 지도자 5, 6명만 있었을 뿐이었으나, 이후 계속해서 주변의 농민군들이 합류하여 수십에서 수백의 세력을 이루었다. 형제바위는 세 방면이 큰 바위로 뒤덮여 있고, 전방에는 농민군이 큰 돌을 쌓아올린 후 총구멍을 내어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관군 측에서는 1895년 1월 8일경, 이곳에 공주감영의 영병을 파견하여 3일간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농민군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 민보군이 찾아와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반격당해 패주하였다. 1월 24일경에는 공주의 관군이 다시 파견되어 공격하였으나 농민군들이 총을 쏘고, 큰 돌과 거목을 떨어트리는 등 격렬히 저항하여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전주 감영에서는 30여명의 포수를 파견하여 대포로 포격을 가하게 하였으나 농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고지에 포탄이 전혀 닿지 않아 탄약만 소비하였다. 관군의 작전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일본군이 나서서 일본군 30여명과 관군 30여명으로 구성된 60여명의 특공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새벽 5시에 등산용 장비를 가지고 형제바위로 기어오르며 사격을 가했으나 사방이 막힌 농민군의 요새에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에 일본군 특공대는 관군에게 전방에서 공격을 명령한 뒤 요새 후면의 절벽을 몰래 기어올랐다. 전면의 관군과의 교전에 집중하고 있던 농민군들은 불시에 배후에서 기습을 받게 되었고, 이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결국 오후 2시경 패전하게 되었다. 특공대를 맞이하여 9시간이 넘게 항전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한 농민군 25명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들은 대게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던 간부들 이었다. 그 중 접주 김석순은 끝까지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한 살 쯤 되는 여아를 안은 채로 절벽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대둔산 전투에 대한 사실은 『주한일본공관기록』, 『의산유고』등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현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가 1999년 원광대학교 사학과에서 발견하면서 공개되었다. 2001년 10월 10일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대둔산 국립공원 등산로 입구에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 전적비’를 세워 이를 기리고 있다.



  삼례봉기 기념비


  완주의 삼례는 백여 호 남짓인 작은 고을이었지만, 도로가 사방으로 뚫린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동학교도 수천 명이 모여 삼례집회를 개최하였고,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혁명 재봉기에 앞서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기포를 준비하였다.


  1892년 11월 3일,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삼례로 교도들을 집결시켜 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의 목적은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금지 등 종교적 요구였다. 주목할 점은 이 집회에서부터 전봉준 장군이 교단 내 중요인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소장을 작성하였으나 탄압이 두려워 이를 올릴 이가 없던 때에 자원했던 이들이 우도의 전봉준 장군과 좌도의 유태홍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이때부터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장군과 함께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는 삼례집회 시기부터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들이 이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 1894년 5월, 전주성을 점령했던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 집강소를 세우고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전봉준 장군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를 맺고 정국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9월 10일 무렵부터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재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도소 설치 후 5, 6일 후에는 손화중 장군이 있던 광주, 최경선 장군이 있던 나주를 방문하였으며 김개남 장군에게도 연락하였다. 이후 각지에 통문을 돌려 함께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관아에도 재기병을 알려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이와 함께 인근 지역의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8월 말부터 재봉기를 준비하였던 김개남 장군도 인근 읍에서 군수물자를 끌어모았고, 9월 26일에는 손화중 장군도 통문을 돌려 인근의 농민군을 광주로 결집시켰다. 그렇게 재봉기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삼례봉기 기념비’는 동학농민혁명 재봉기가 삼례에서 일어났음을 기념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1996년 세운 것으로, 비의 뒤편에는 삼례집회와 동학농민혁명 재봉기에 대한 관련사실이 기록되어있다.



  삼례봉기 역사광장



추념의 장 


  현재 삼례봉기 터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2003년에 조성한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들어서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시설 가운데 규모가 큰 편이고, 구성이나 내용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광장으로 들어서는 오른편에는 표지석이 서있으며, 그 뒷면에는 동학농민혁명사에 삼례가 가지는 의의를 새겨두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사각형의 기둥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둥의 각 면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한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광장에 들어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추념의 장’을 볼 수 있다. 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추념의 장’은 이름 없이 스러져간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념하며 자신과 동학농민군상 그리고 하늘이 거울에 함께 비쳐 하나 되는 체험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정신을 인식하게 하는 사유의 장이라 설명되어 있다.


  ‘추념의장’의 왼편에는 돌무더기에서 튀어나와 쇠스랑을 잡고 있는 농민의 손과 팔뚝을 형상화한 ‘대동의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입구의 표지석 뒤쪽에는 재봉기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학농민군 출진상’이 2004년 추가로 설치되어 자리하고 있다.



  위봉사



위봉사


  1894년 4월 27일, 농민군은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한발 늦게 전주에 도착한 홍계훈은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농민군과 대치하였다. 전주성을 사이에 둔 관군과 농민군의 첫 전투에서 무기의 열세와 지형적 불리함을 가지고 있던 농민군들은 패하여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홍계훈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아래로 내려와 전주성을 향해 계속 대포를 발사하였으나 견고한 성문을 부수지는 못했다. 이때 발사한 포탄의 일부는 전주성내의 경기전을 훼손하였다. 다행히 이때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경묘의 위패를 전주 판관 민경승이 위봉사로 옮겨두어 훼손되지 않아 오늘날 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홍계훈은 자신의 지시로 발사한 포탄이 경기전을 손상시키자 이를 농민군들이 훼손하였다고 상부에 거짓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도재 영세불망비


  이도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농민군 진압에 앞장선 인물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장군 등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을 체포하였으며, 특히 김개남 장군을 초록바위에서 처형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개남 장군은 우금치전투의 패배 이후 전봉준 장군과 함께 전주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태인현에 피신하였으나, 1894년 12월에 옛 친구인 임병찬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도재는 규정상 심문을 위해 김개남 장군을 서울로 압송해야 했으나, 호송하는 도중 농민군의 습격으로 탈취당할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조정의 명령 없이 전주성 서문 밖 초록바위에서 형을 집행해 버렸다.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김개남 장군의 수급은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수되었다. 이도재는 조정의 명령 없이 경솔히 체포자를 처형하는 큰 죄를 저질렀으나 겨우 감봉2등급(봉금의 10분의 2를 감봉하는 것)의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그는 같은 해 같은 월, 옛 농민군인 김경천의 밀고를 통해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 장군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기도 하였다. 현재 완주군 신금리에 위치해 있는 이도재 영세불망비는 가운데에서 절반으로 두 조각이 나는 훼손을 당했다가 다시 맞붙여놓은 모습이다. 이 비 바로 옆에는 홍주목사로 재임 중 호연초토사를 겸임하여 충청도 서북지역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주도 했던 이승우의 영세불망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역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의도적인 훼손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려 보인다. 이는 1907년 지역주민들이 건립한 것이기에, 만약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된 것이라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살아남은 농민군과 유족들의 응어리진 한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가슴속에 남아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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