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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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 14호
보은, 옥천, 영동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보은, 옥천, 영동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충청도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본거지로 삼아 동학교단의 본부를 세운 곳으로 특히 충청북도에서 보은집회가 열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충청북도의 농민군들은 1894년 9월 18일 일제히 기포하였으나 봉기와 동시에 관군과 민보군, 일본군에게 일제히 공격받에 된다. 그러나 공주 우금티의 패배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대항하다 수많은 농민군들이 한 떨기 꽃처럼 스러져 간 곳이 바로 충청북도이다. 특히 영동과 보은, 옥천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곳으로 전적지 등 동학농민혁명 유적지가 다수 분포해있다. 또한 보은의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등 기념시설 또한 잘 갖추어져있어 돌아볼 곳이 많은 풍성한 답사가 되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11월 가운데에 들어서 얼다 만 눈이 추적추적 내렸다. 하루하루 날이 지나 어느새 겨울을 알리는 전령이 내려온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때가 되면 계절이 지나고 한 해가 마무리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막상 연말이 다가오면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듯 올해의 미련보다는 내년의 희망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충청북도로 향한다.


  가장 먼저 들른 지역은 보은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번 119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던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 둘레를 따라 빙 둘러있는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인내천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정자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저만큼 위쪽에 기념탑이 올려다 보이는 광장으로 들어서게 되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오르막길로 접어들면 직선으로 기념탑에 오를 수 있는 돌계단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에는 공원을 전체적으로 촬영하기 위해 광장을 통해 하늘길이라 이름 붙여진 나무계단으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 답사 전날 눈이 내렸는지 소담스레 쌓인 흰 눈에 발자국을 남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이윽고 기념공원의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기념탑에 다다랐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라 새겨진 이 탑은 쓰러진 전우를 안고 있는 농민군 동상이 인상적이다. 왼손으로는 동료를 감싸고 있지만 오른손에 받쳐 들고 있는 죽창의 끝을 노려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들이 쓰러지더라도 높이 솟은 죽창 같은 기상은 꺾을 수 없을 것이라 외치는 듯한 모습이다. 그에 걸맞게 그들의 뒤쪽으로는 하얀 대리석으로 쌓여진 탑이 곧게 서있으며,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부조와 동학농민군들의 글귀가 새겨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보은군에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조성하였으며, 손꼽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시설로 자리하고 있다.



  김소천가


  다음으로 북실전투 직전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머물렀던 김소천가로 향했다. 이 곳은 소촌찰방을 지낸 김세희의 집으로 당시에는 북실 일대에서 가장 크고 잘 지어진 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우금치에서의 패배 이후 북접농민군이 북실로 모여들자 일본군과 민보군의 연합부대는 북실로 이동하여 12월 17일 야습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마을 입구를 지키던 농민군을 붙잡아 김소천가에 북접농민군 지도자들이 김소천가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캐낸다. 일본군과 민보군 연합부대는 정보대로 김소천가를 기습하였고, 그곳에 머물고 있던 농민군 지도자들은 재빨리 도주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는 다음날인 18일, 수많은 농민군들이 희생되었던 북실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김소천가는 과거의 대저택과는 거리가 멀지만 대문 왼편에 쌓여있는 나무장작들이 어색하지 않은 옛집이었다. 외부에서 몇 번 촬영하고 난 뒤 내부로 들어가자 마치 탈곡기를 돌리는 듯 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고개를 돌려보자 수 많은 원앙들이 우리 안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외부 벽에 걸려있던 원앙이집이라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던 현수막이 바로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을 보호하는 곳이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건물은 ㄷ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위치한 건물의 문틀은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접이식 창호문을 사용하던 대저택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단서로 자리 잡고 있다.



  북실전투지


  보은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전투였으며 동시에 가장 많은 농민군들이 희생된 전투는 바로 북실전투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소천가를 습격하였으나 소득을 얻지 못한 일본군과 민보군 연합부대는 곧바로 북실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들을 공격하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하였고 무기의 화력차이도 컸기에 농민군들은 거의 학살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일본군은 전투 중 사살된 농민군의 숫자를 300명이라 보고했지만 이는 축소된 숫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적어도 400명 이상이 희생당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북실전투지 근처에 도착했을 때 산길로 접어들어 도보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쌓인 눈이 녹아 가는데다 그 아래는 낙엽으로 덮여있어 바닥이 매우 미끄러워 꽤나 애를 먹게 되었다. 약간의 고생 끝에 전투지에 도달하여 촬영할 수 있었지만 동학농민군의 흔적을 찾는 이들을 위한 자그만 오솔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장내리 집회터


  보은의 동학농민혁명 역사를 논한다면 역시 보은집회를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해인 1893년 동학교단은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복합상소 운동을 한 뒤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3월 10일부터 4월 5일까지 개최된 보은집회에는 동학교도 약 2만 3천여 명이 집결하였으며 이들은 척왜양운동을 전개하다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내려 보내는 등 효유하자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믿고 해산하였다. 또한 장내리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도 많은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곳이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로 집결하라는 기포령을 내리자 수만 명의 농민군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수백 개의 초막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의 보은 취회지에는 보은장안동학취회지라 쓰여 있는 입간판이 덩그러니 세워진 논의 모습이었다. 논은 이미 추수철이 지나 키 작은 볏짚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휑하다기보다는 마치 그 볏짚 하나하나가 농민군의 모습같이 보여 황금들판 만큼이나 멋진 곳이 아닌가 싶었다. 논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길은 보은집회 당시 농민군들이 훈련을 위해 축성한 돌성의 흔적이라 하며 훼손되어있기는 하나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동학의 지도부와 농민들이 이곳에 모여 집회를 가지며 훈련이라는 군사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후년에 있을 봉기에 대해 어느 정도 예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모여든 농민군들이 어떤 마음으로 집회에 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굳은 결의가 있었음은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


  보은의 유적지를 둘러본 뒤 다음 목적지인 옥천으로 향했다. 그 중에서도 처음으로 찾은 곳은 1997년 11월 7일에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순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건립한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다.


  최시형은 1861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1863년 최제우를 이어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다.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감시를 피해 동학의 포교에 힘썼으며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을 발간하여 경전을 완성하였다. 1대 교주 최제우가 동학의 사상을 만들었다면, 2대 교주 최시형은 이를 정리하고 다듬어 세상에 알리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최시형은 2차 봉기에 대해 처음부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최시형이 7월경까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전언한 바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이 계속해서 희생당하는데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삼례에서 2차 봉기가 일어났고, 교단 지도부에서도 기포 요구가 이어지자 전봉준 장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포령을 내리게 된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최시형은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라는 말로 기포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일어나게 되었다.


  현재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한곡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산 문바위


  최시형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당시 기포령을 내렸던 한곡리에는 옥천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김영규, 김재섭, 김정섭, 박맹호, 박창근, 박희근, 신필우 등이 목숨을 건 투쟁을 결의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둔 문바위가 있다. 이곳은 2차 봉기에 참여한 농민군 수천여명이 모여들어 ‘새 서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문바위라는 곳이 유명한 유적지도 아닌데다 초행자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복잡하다 하여 답사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그러나 대로변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문바위’라고 적힌 표지판을 볼 수 있었고, 이후에도 문바위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입간판들이 드문드문 서있었다. 옥천군에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되었다. 덕분에 손쉽게 문바위에 도달 할 수 있었다. 문바위 앞쪽에 솟아있는 소나무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바위 위에 흩뿌려진 소나무 낙엽이 운치를 더해주었다. 문바위에 새겨진 이름은 앞쪽의 큰 바위가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틈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끼가 많이 끼기는 했지만 김영규라고 새겨진 이름이 분명하게 보였다. 이름을 발견하고 측면의 모습을 보기 위해 돌아 나오는 길에 무심코 바위에 손을 올렸을 때 유난히 깊은 홈이 패여 있는 것을 느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에 세 명의 이름이 더 새겨져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이름을 새기며 나라를 위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백년이 넘는 세월 속에 비와 바람에 침식당한 바위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바위 뒤편으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듯하여 잠시 구경할 요량으로 언덕을 넘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글귀가 적힌 구조물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마도 문바위를 옥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대표유적지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이후 방문 할때는 멋진 기념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월전 전투지


  보은과 옥천을 지나 마지막 답사지인 영동으로 접어들었다. 영동은 특히 북접농민군들이 민보군과 격전을 치른 곳으로 전적지가 다수 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월전 전투가 있었던 월전마을로 찾아가면서 길은 점점 산으로 향했다. 아무렇게나 흩어놓은 밧줄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오르막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접어드는 도마령 고갯길로 접어든 것이다.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모를 오르막을 올라 해발 800미터인 상용정에 다다르자 멀고 가깝게 펼쳐진 고산준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관경이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상쾌함도 잠시, 올라온 길 만큼이나 굽이쳐 펼쳐진 내리막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우금티 전투이후 패배하여 태인까지 밀려간 북접의 농민군들이 근거지인 충청도로 향하기 위해 임실, 장수를 거쳐 무주로 향했다. 이들은 무주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무주 설천과 월전에서 무주의 민보군을 격파하였다.


  쉽사리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월전 마을은 30여 호나 될법한 고즈넉한 조그만 마을이었다. 마을의 입구에 위치한 쉼터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둘러보니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무주의 민보군들을 맞이하여 어떻게 전투를 벌였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산을 넘다 지친 민보군을 맞이하여 효율적인 수비를 펼쳤을까? 아니면 민보군이 진입할 골짜기에 매복하여 기습하였을까? 어떤 활약이었든 우금치의 패배를 딛고 일어나 민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항성을 드높였을 농민군들을 생각하여 가슴 뜨거워짐을 느꼈다.



  용산 전투지


  농민군의 행보를 따라 굽잇길을 뒤로하고 용산 전투지로 행했다. 현재의 용산전투지에는 용산중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체육수업 중이었는지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잠시 학교 운동장을 거닐었다. 월전 전투지에서 승리를 거둔 농민군은 영동 읍내를 점거한 뒤 용산장터에 주둔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병력을 영동지역 농민군들을 소탕하기 위해 투입하였다.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기 전날, 농민군과 민보군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민보군은 농민군을 계곡으로 유인하여 기습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오히려 농민군의 유인책에 빠져 후퇴하였다. 다음날 아침 민보군과 관군이 연합하여 다시 한 번 농민군을 공격하였으며, 농민군은 용산의 정상에 진을 치고 적군을 맞이하였다.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적군을 막아내었으며 청주영관을 살해하는 등 성과를 거두며 승리하였다. 다음날 관군과 민보군은 청산 대동으로 물러났고 농민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보은과 원암 지역까지 쫓아내었다.


  이러한 대단한 성과를 올린 때가 1894년 12월 중순, 즉 우금치에서의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태인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월전에서, 그리고 용산에서 다시 한 번 전투를 치르고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그 정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들이 개인의 영달을 목표로 일어났다면 결코 이런 정신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보국안민, 제폭구민.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일어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정신을 새삼 깨달았다. 충청북도 지방의 농민군들을 위하여 고개 숙여 묵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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