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농민봉기의 전개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고부군수 조병갑의 재부임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난 조병갑이 부임지로 가지 않고 계속 고부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취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이은용, 신재묵,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철 등이 순서대로 고부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단 한명도 부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전라감사 김문현은 거짓 장계를 조정에 올려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다시 발령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하였다. 그 사이 1893년 12월 전봉준은 사발통문의 거사계획을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주감영에 다시 수세 감면을 비롯한 폐정개혁을 호소했다. 그러나 김문현은 전봉준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더구나 조병갑은 1893년 11월 익산군수로 발령을 받고도 고부관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결국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명된 하루 뒤인 1894년 1월 10일 드디어 고부군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고부농민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고부관아로 진격
예동 마을에 모여든 고부민들은 5백여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말목장터를 거쳐 읍내로 진격해 들어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아전들을 취조하여 처벌하였다.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확보하여 세력을 확충하고, 수세로 거두어들인 양곡 1,400석을 몰수했다. 또한 진전에서 거둔 세곡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고부민들의 직접적인 원성을 가져온 만석보를 헐어버렸다. 이때 고부군 15개 마을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1만여 명이나 되었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고 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고부군민들은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고부 읍내에 장막을 치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면서 진을 치고 있었던 고부 농민군은 1월 17일 말목장터로 진을 이동하여 설치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이든 사람이나 어린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장정들만으로 농민군을 갖추었다. 이들 고부 농민군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확고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이 고부봉기를 주도하였지만 그 외에도 각 마을의 동장, 집강 등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의 책임 하에 모여든 고부 농민군은 단결력이 한층 강화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각 마을의 동장과 집강들은 고부봉기를 주도한 지도부와 고부 농민군들을 연결하는 중간 기구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백산에 진을 치다
말목장터에 진영을 설치하고 있으면서 각 면리 별로 취회에 참가하고 있던 고부농민군들은 백산으로 진을 이동하였다. 그러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전주영의 군위 정석진을 시켜 전봉준을 만나게 하면서 해산을 권유하였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수십 명의 군사를 상인으로 변장시켜 장터로 잠복시켰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전봉준은 이들을 붙잡았으며 도망가던 정석진은 고부 농민군들에게 살해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 농민군들이 일정한 조직과 세력을 갖추고 백산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조정에서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나문정죄(죄인을 잡아 심문하고 죄를 판단하고 결정)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월봉삼등(삼등급 감봉)하였다. 또한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새로 임명하는 한편,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확산되지 못한 봉기
백산에 진을 치고 있던 고부 농민군은 2월 23일 다시 백산을 출발해 고부군을 재점령한 뒤, 군기고의 무기로 무장을 강화하고 25일 다시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백산 근처에는 장시가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만 고부 농민군들은 한달 여 동안 소강상태로 있었다. 그러자 이때부터 고부 농민군 내부적으로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단단한 조직력으로 결속되어 있던 고부 농민군 내부에 의견이 상충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실천적인 행동에도 제약이 따르게 되었다.
2월말 전봉준은 함열 조창에 나아가 전운영을 격파하고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하자고 했으나 ‘민요가 월경하면 반란의 칭을 받는다’는 이유로 고부 농민군들이 응하지 않았다. 이같은 내부적 갈등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최고지도부와 중간지도부 사이에 서로 지향했던 바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중간지도부가 이탈하자 하부 농민들까지 해산하여, 결국은 고부봉기는 한계를 맞게 되었다.
이때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은 음식상을 크게 차려 고부 농민군들을 불러모아 “여러분이 조용히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지낸다면 죄를 용서하고 읍폐를 시정하겠다”며 해산을 설득하는 효유책을 구사하였다. 이에 고부 농민군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결국은 고부군의 지역경계를 벗어나기 않으려 했던 고부 농민군의 뜻에 따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폐정을 개혁하고 탐학한 관리를 제거하는 데 뜻이 있었던 고부 농민군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되자 더 이상 투쟁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점은 고부봉기가 종래의 봉기와 다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봉준 등 상층지도부가 지향했던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불씨
박원명의 설득으로 고부 농민군 기본세력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눈치만 살피면서 고부에 들어오지 않고 있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로 들어왔다. 그는 고부에 들어오자마자 박원명의 수습책을 오히려 뒤엎고 봉기 참가자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용태는 역졸 800여명을 거느리고 고부로 난입한 후 박원명을 협박해 봉기 참가자를 색출,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 살육하였다. 고부 농민군은 3월 13일 더 이상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전봉준 등 지도부는 무장의 손화중포로 피신하였다. 고부농민봉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전봉준의 노력은 성과 없이 끝을 맺는 듯했다. 그러나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보다 더 큰 항쟁, 즉 부패한 시대에 대한 조선농민의 총체적 항쟁으로 서서히 옮겨 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김은정·문경민·김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출판, 1995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