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대도주 미래를 내다본 동학농민군
참여자|이원익의 손자 이상옥
동학농민혁명을 준비함에 있어 동학의 사상을 알려 농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옥 선생님의 조부 이원익 참여자께서는 충청지역의 대도주로서 우금치 전투, 보은 북실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동학의 사상을 충청도 지역에 알리고 교육하여 그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올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지금도 조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해오고 있는 이상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로 어느 지역에서 활동하셨나요?
답) 저희 조부께서는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우금치 전투와 보은 북실전투에 참여하셨는데, 보은에서는 총을 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돌맹이, 창 등을 들고 싸우다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겨우 목숨을 건진 조부님은 최시형 교주를 모시고 경상북도 불정에 있는 외가에 몸을 피하셨다고 합니다.
문) 최시형교주와 함께 피신하셨다고 하셨는데, 평소에 서로 친분이 있으셨던 걸까요?
답) 몸을 피하는데 잘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부탁하지는 않을 테니 두 분이 잘 알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자칫 목숨을 잃으실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최시형 교주를 모시고 외가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최시형 교주께서는 외가에 2주 정도 머물러 있다가 떠나셨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주로 언제 말씀해 주셨을까요?
답) 평소에도 자주 말씀해 주셨고, 식사하실 때면 꼭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조부님께서 제가 14살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다보니 머릿속에 새겨지다시피해서 지금까지 그 말씀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학을 했다는 것을 들키면 곧바로 잡혀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는 절대 얘기를 꺼내지 않으셔서 이웃사람들도 몰랐을 겁니다.
문) 조부님께서 어떤 말씀을 많이 해주셨을까요?
답) 앞서 말씀드렸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던 이야기들과 당신께서 깨달으신 시국에 관한 이야기와 앞으로 변해갈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시국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미래를 내다보셨던 이야기들도 착착 맞아 들어가고 있어 조부님께서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보고 계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말씀해 드리자면 조부께서 1950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면서 ‘올해 안에 나라에 큰 난리가 날것이다. 하지만 굳이 고향을 떠나지 마라. 괜한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가족들은 조부님의 말씀을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피난가지 않고 별 탈 없이 전쟁을 났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피난 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는 말을 듣고 조부님께서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또 옛날에는 마을에 디딜방아라고 발로 밟아 곡식을 찧는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조부님께서 그곳에서 곡식을 찧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뒤꿈치가 없는 신발이 나올 것이다. 여자들도 옷을 사 입게 될 것이다 등 앞으로의 세상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조부님께서 돌아가신 뒤 한 번씩 고향에 찾아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당신 할아버지는 사람이 아닌 귀신이야. 어떻게 뒷날의 일을 그렇게 잘 아셨을까?’하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또 저에게는 ‘나중에 할아버지가 꼭 생각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씀도 꼭 들어맞은 것 같습니다.(웃음)
문) 조부께서 동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것 같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대도주로서 임명장까지 받으셨으니 상당히 도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 간혹 중원에 살던 할머니가 저녁에 집을 방문하면 조부님께서 글을 써주셨습니다. 그분은 그 글을 받아서 저고리에 감추고 돌아가곤 하셨지요. 훗날 알고 보니 그 분이 충청도 지역은 물론이고 경기도 여주까지 가서 조부님의 글을 전달했다고 하니 조부님께서는 충청도지역에서 동학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문) 조부님의 유물을 보유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답) 대도주로 임명되시면서 받으셨던 임명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권장선언이라는 책을 남겨두셨는데 제가 이 책이 있다는 것을 천도교 수원교구에 알려주었습니다. 수원교구에서는 그 책의 내용을 인터넷에 게재해 두었는데 서울교구에서 그것을 보고 이 내용을 어떻게 알고 올렸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알고 보니 천도교에서도 보유하지 못한 책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책자들도 다수 남기셨습니다. 조부님께서 자신의 물건들을 가지고 있으면 국가에서 찾을 때가 온다고 말씀하셔서 계속 간직해오고 있고 자손들에게도 물려줄 생각입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지는 않으셨나요?
답) 해방 일주일 전쯤에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신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큰 고초는 겪지 않으시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셨다가 아침을 드시고 서로 들어가는 생활을 3일간 하시고 풀려나셨습니다. 그러나 순사들이 조부님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서적들을 압수하여 불을 질러버리는 바람에 중요한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지요. 그런데 조부님께서는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내용을 다 알고 있고, 후에 다른 누가 보더라도 해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해 없이 풀려나신 것이 천운이라며 자신은 하늘이 살린 사람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조부님께서 시국에 밝으시고 미래를 내다보셨던 것도 다 동학을 하시면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도 당연하겠지요. 저는 이전에도 조부님을 존경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존경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