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길에서 조국의 길로
- 풍암(灃菴) 이병춘 선생의 발자취
날짜 : 2025. 5. 27.(화)
장소 : 전주 동학농민혁명 파랑새관
참여자 : 이병춘(1864. 2. 2.~1933. 6. 29.)
유족 : 이길호

이길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병춘의 손자
이병춘 선생은 1887년 동학에 입도한 후, 임실ㆍ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포덕 활동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삼례집회, 보은 교조신원운동, 진산 전투, 2차 기포 등에 적극 나섰으며, 이후 3ㆍ1운동과 독립자금 모금에도 뜻을 함께 하였다. 손자인 이길호 선생은 이러한 조부의 정신을 기려 다수 유물을 기념재단에 기탁하고, 유족 활동과 천도교 전파에 힘쓰고 있다.
문) 먼저, ‘녹두꽃’ 독자분들께 인사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자 독립유공자이신 풍암(灃菴) 이병춘의 손자, 근암(根菴) 이길호입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국가유공자이시며, 저는 현재 (사)동학농민혁명유족회 대의원 겸 전주·완주 유족회 이사,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 천도교 전주교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 이병춘 선생님은 주로 임실, 전주 등 전북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1880년대 당시에는 이 지역에서 동학의 세가 크지 않았습니다. 1887년 이병춘 선생님이 동학에 입도한 이래 로 점차 동학의 교세가 확산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답) 1884년 6월,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께서 익산 사 자암에 은거하시며 여산 사람 박치경의 주선으로 수도와 포덕에 힘쓰셨습니다. 이후 동학은 전주 등 전라도 일대로 확산되었습니다. 24세의 나이로 입도하신 조부님은 수개월 만에 20여 읍에서 수천 명을 포덕할 정도로 활발히 활동하셨습니다. 특히,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소식이 전해지자, 전주 이씨 문중과 임실 현감 민충식까지 입도하여 임실 군민 대다수가 동학도가 되었습니다. 최시형 선생께서 순도하신 이후, 조부님은 순창 마흘리 선암사에 은거하시며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절 주변 60여 명을 입도시킬 만큼 포덕에 헌신 하셨습니다. 입도 이후 조부님은 최시형 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과 함께 교조신원운동과 제2차 동학농민혁명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으며, 동학·천도교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진 분입니다.

 
문) 이병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활동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1892년 삼례집회를 시작으로 백산대회 참석, 집강소 설치, 2차 기포 등 많은 활약이 있었지요.
답) 1864년 2월, 조부님은 전북 임실군 상동면 효촌에서 태어나셨고, 스물네 살이던 1887년 말경 동학에 입도하셨습니다. 이후 1892년 삼례집회, 1893년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 교조신원운동, 1894년 진산 전투 시의 피체, 집강소 활동, 2차 기포 등 동학농민혁명 전반에 걸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특히,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임실을 대표하는 접주로서 활약하셨습니다. 조부님의 첫 기포는 3월 25일경 임실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4월 2일에는 『호남의비록(湖南義非錄)』을 저술하시고, 최성명 등과 동행하여 진산군에 갔다가 민포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1894년 9월에는 함열의 김방서, 오지영, 익산의 오경도, 고제정 등 각 지역 접주들과 2차 기포에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이들은 전봉준 등과 함께 북상하여 공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 후 흩어졌다고 전해집니다. 2차 기포 시기, 관에서 최시형 선생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조부님께서는 10월 13일부터 11월 28일까지 최시형 선생을 직접 수행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근거리에서 최시형 선생을 모실 정도로, 조부님은 동학 교단 내에서 깊은 신뢰를 받으셨습니다. 실제로 조부님은 1895년 무장 접주를 맡으셨고, 1900년에는 팔도 대접주에 임명되셨습니다. 교단 기록에는 갑오년 이후에도 조부님의 활동이 꾸준히 등장합니다. 이후 천도교에서 천도교 전주 대교구장, 성도사 등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셨고, 1919년에는 서울과 전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종법사장, 법정 등 주로 천도교의 고위 직책을 역임하시며 활발히 활동하시다가, 1933년 6월에 환원하셨습니다. 장례는 천도교 중앙 교회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병춘
문) 민포군에게 체포되었을 당시의 이야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남원 지역과 연원이 있는 동학 순교자를 대상으로 작성한 『순교약력』에 따르면, 1894년 4월 진산군에서 민포군에게 잡혔다가 겨우 생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답)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의 종손 최성명, 강일회, 그리고 우리 조부님 세 분이 최시형 선생을 뵈러 가던 중, 충남 진산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동학도인을 토벌하려던 금산, 용담군에게 체포·포박되어 행장을 조사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과정 중 『입의록』 2권이 발각되자, “이것들은 동학 괴수가 틀림없다”라며 붙들어 무수히 때리고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최시형 선생의 거처나 다른 동학인들에 대해 전혀 실토하지 않자, “이놈들은 진산을 토벌한 후 돌아가는 길에 죽이겠다”하고 진산으로 향했습니다. 머지않아 포성이 진동하였고, 동학농민군 6명이 포로로 잡혀 와, 어느덧 포로는 총 9명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진산을 토벌한 후 돌아와 우리 조부님을 포함한 9명을 죽이려 하였으나, 다행히 총에 불이 붙지 않아 결국 금산으로 끌려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옥에는 이미 붙잡혀 있던 4명이 있어, 포로는 총 13명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이놈들은 최시형 선생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조부님을 연이어 문초하였습니다. 하도 매질을 당해 다리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조부님은 계속해서 “모른다”고 일축하는 것으로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결국 쓰러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이놈들은 조부님을 강가에 버렸습니다. 운 좋게도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발견하여 구해주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 순교약력
문) 이처럼 이병춘 선생님께서는 목숨을 위협받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지키며 최시형 선생과 교단을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뜨거운 신념과 실천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쓰셨고, 마침내 3·1운동에까지 참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 조부님은 1919년 3·1운동 당시 전라북도 총책임자로 상경하여,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공훈록』을 비롯한 『동학천도교인명사전』에도 “이병춘은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라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습니다.특히 주목할 점은, 조부님께서 서울 만세운동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조부님은 고산교구장 김태현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계획하였습니다. 이후 오지영과 함께 전국의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담양군 교구장 황정욱이 조부님에게 독립운동자금 명목으로 300원을 전달하였습니다. 이병춘 소행 조서에 따르면, 조부님은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일제의 심문 과정에서도, “김태현과 만난 적이 없으며, 독립운동자금과는 무관하다”라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셨습니다. 또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냐고 묻는 질문에도 “우리들이 그런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도저히 될 일이 아니므로 그런 희망은 없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이는 심문을 회피하고 교단과 동지를 보호하려는 조부님의 전략적 침묵으로 해석됩니다. 출옥 후에도 조부님은 상하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2년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습니다.

▲ 이병춘 국가유공자증
문) 이병춘 선생님께서는 생애 전반에 걸쳐 동학(천도교)의 정신을 실천하며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선생님의 활동이 가족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답) 조부님의 활동은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부님의 동생 이병용 님은 임실에서 기포하는 등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으나, 조부님의 행적을 추적하던 민포군에 의해 1894년 4월경 28세의 나이로 타살되었습니다. 제 조모의 부친 박기준 님도 동학 접주로 활동하셨으며, 그 아들인 박성근 님은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천도교 도사·종법사·전주교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박성근 님의 아들 박찬문 님 또한 천도교 전주교구장을 맡으며, 가산을 독립자금에 투입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또한 조부님은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함께한 전주 지역 접주 양암(陽菴) 최재붕 님과 사돈 관계였습니다. 최재붕 접주의 따님이 조부님의 둘째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조부님의 친인척과 주변 인물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동학·천도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한 분들이었습니다. 이는 조부님의 활동이 단지 개인적 실천에 그치지 않고, 가족과 지역 공동체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줍니다.
문) 이병춘 선생님의 친인척을 포함한 주변 분들 대다수가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동학(천도교)의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가계의 흐름 속에서 동학농민혁명 유족이라는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요?
답)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참여하셨고, 천도교에서 중책을 맡았던 큰 인물이었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회사에 다니며 생업에 전념하던 시기에는 동학농민혁명 유족 신청이나 기념재단 활동 등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퇴직 후, 손병희 선생과 조부님 사이에 오간 서찰 내용을 확인하고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기념재단에서는 조부님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준비 중이었고, 2004년 직권조사에 따라 조부님께서 공식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셨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권등록이 되어 있더라도 별도로 유족 신청을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정식으로 유족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2019년은 제게 매우 뜻깊은 해였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부님의 독립운동 공훈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고, 그해 저는 천도교 전주교구를 찾아가 입교하였습니다. 같은 해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는 조부님의 활동이 학문적으로 조명되었고, 저도 유족으로서 자리에 함께하며 깊은 자부심과 감동을 느낀 기억이 생생합니다. 또, 이 시기를 계기로 동학농민혁명 유족 신청까지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 3ㆍ1운동 기념 100주년 학술대회
문)이러한 과정이 계기가 되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이병춘 선생님과 관련된 여러 서책과 유물을 기탁해 주신 것 같습니다. 재단에 기탁해 주신 자료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기탁한 자료는 총 60여 점으로, 그 가치의 유무를 떠나 조부님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풍암공실행록(李灃菴公實行錄)』, 천도교 창건사, 봉승심법(법문), 영결식순, 천도교 및 각계 인사의 부의, 천도교 기관지 환원기사(『월보』, 『당성』), 서적, 조부님의 글씨 ‘풍암도호(灃菴道號)’, 그림 등이 있습니다. 특히, 『이풍암공실행록』은 조부님인 풍암 이병춘 선생의 활동과 생애를 담은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포덕 52년(1911년)에 작업을 시작해 포덕 56년(1915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부님이 직접 구술한 내용을 문하생 김재홍이 정리해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한 총 112면 분량의 자료입니다. 1864년 조부님의 출생부터 1915년경까지의 주요 행적이 상세히 담겨 있습니다. 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박사의 해제에 따르면, 『이풍암공실행록』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불과 17년 만에 혁명 참여 당사자인 이병춘 선생의 구술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며, 전봉준 접주가 이끈 농민군과 최시형 선생이 이끄는 교단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심화 연구가 기대되는 자료라고 합니다.

▲ 이풍암공실행록 표지 ▲ 이풍암공실행록 - 전봉준 원평집회 주도 관련 내용
문)말씀하신 자료 중 『이풍암공실행록』에는 1893년 원평집회 당시 전봉준의 행적, 동학 입도 방법, 접주 임명 절차, 1894년 최시형의 이동 경로 및 활동 내용 등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를 기념재단에 기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답) 유족 신청 당시 기념재단에서 자료가 있으면 보여 달라고 요청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조부님의 자료를 천도교에 기증할 생각이 있었기에 기념재단에 보여주지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후일담이지만, 만약 그때 이 자료를 재단에서 확인했다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다른 자료와 함께 추진해 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손자인 저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자료는 작성된 지 115년이 넘은 오래된 문서로,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훼손되어 관리에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보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중, 자료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존할 수 있는 전문 연구기관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손병희 선생과 조부님이 주고받은 간찰(簡札) 등 일부 관련 유물이 이미 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었기에, 분산보다는 한곳에 모아두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박사에게 자료를 보여드리고 의견을 들은 후, 기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12월 9일, 기념재단에 직접 방문하여 자료를 전달하였습니다. 이 자료들이 동학(천도교)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기타 역사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 마지막 질문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으로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나 관련 정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먼저, 기념재단과 유족회, 기념사업회, 정부 및 지자체 간의 조화로운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기관이 가진 장점을 서로 존중하고 공유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사상을 함께 계승하고 선양해 나가야 합니다. 둘째,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존중, 평등 세상, 대동 사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담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은, 헌법의 이념적 토대로서 충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위해 국회 차원의 논의와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셋째,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식의 위상 격상이 필요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차지하는 위상과 희생 규모, 민주주의의 효시라는 역사적 의미를 고려할 때, 정부 대표 역시 장관급이 아닌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넷째,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세계화·미래화를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그 문화적 유산과 가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같은 세계화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야 합니다. 전주와 정읍에서 추진 중인 세계혁명예술제, 세계혁명도시 연대회의처럼, 동학농민혁명을 세계적인 혁명으로 알리고 젊은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섯째, 동학농민혁명 유족에 대한 수당 지급이 필요합니다. 이는 지금껏 묻혀 있던 유족들이 수면 위로 나올 수 있는 실질적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적은 금액일지라도 등록된 유족 전원에게 수당이 지급되어야 하며, 전북도와 전주·완주 등의 지자체 협의를 통해 내년 초부터 시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북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역사 교육의 강화가 꼭 필요합니다. 초·중·고·대학교의 필수 이수 과목으로서의 역사 교육 정착과 함께, 각종 시험에서도 역사 과목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게 해야 합니다.
문) 선생님, 긴 시간 동안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소식지 유족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대담자: 기념재단 기획운영부 임현진)

▲ 이병춘 선생 묘소(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