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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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16호
황토현 전투의 재구성

  황토현 전투의 재구성


정읍시 문화관광해설사 류태길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전투에서 첫 승전은,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인 전쟁으로 구체화된 시발점이라는 점에서나 전투의 규모면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1963년 황토봉에 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되고, 황토현전적지가 사적으로 등록된 이후 구 기념관 개관, 현 기념관 증축 개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이전되는 등, 동학농민혁명 관련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앞으로 이곳에 대규모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조성계획이 입안되어있어 황토현 전적지는 명실상부한 동학농민혁명의 성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토현전적지에 대한 인지도는 높고 탐방객의 관심도 높아지는데, 문헌들은 구구하고 차이가 많아 구체적인 전투상황과 전투 장소 등을 설명하는 데에 혼란을 주고 있다.



  황토현 전투개요


  황토현 전투에 대해 관군이 먼저 공격했다는 설, 동학농민군(이하 농민군)이 먼저 공격했다는 설, 지명의 위치 등이 혼란의 주 내용이다. 대체로 관군 선제 기습설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천태산을 넘어 4월 6일 고부 도교산에 진을 쳤다. 김개남 부대도 6일 도교산으로 진을 옮겨 전봉준. 손화중 부대와 합류하였다. 관군 역시 4월 6일에는 황토재 아래 진을 쳤다. 도교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3대로 나누어 세 봉우리에 불을 놓고 관군과 대치하였다. 7일 새벽 세 곳의 불 중에 가운데 봉화만 남고 양쪽의 불이 꺼지자 관군은 농민군이 잠든 것으로 판단하고 기습 공격하였다.”

  “관군의 공격을 기다린 농민군은 양쪽에서 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앞쪽에서 협공, 즉 삼면을 포위하여 관군을 대파하였다. 관군의 기습을 예상한 농민군은 협공의 계책으로 관군을 격퇴한 것이다.”

  [신순철, 이진영 공저 『실록 동학농민혁명사』65쪽]


  다음은 농민군 선제 기습설이다.


 “동학농민군은 관군을 황토현으로 유인한 후 거짓 패하여 약간 높은 구릉지인 두승산록 계곡 시목리로 철수하여 본진을 설치하고 복병 하였다. 4월 6일 저녁 관군은 황토현에 도착하였다. 황토현은 일명 사자봉이라고 하여 사자는 사시(死屍)와 통하니 이곳은 관군의 시체를 묻을 곳이라 하여 농민군의 투지가 만만하였다. 관군의 본영 황토현과 농민군의 본진 시목리는 서로 떨어지기 15정(町,약 1,6km)으로 서로 대하여 있는 두승산록 맥좌였다. 이날 밤 농민군은 보부상을 가장하여 관군의 진중에 들어가 관군의 동태를 살펴 본진에 보고하였다. 관군은 안심하고 술에 만취되어 잠들었다. 7일 삼경 조금 넘어 농민군 1대는 서남의 정면으로, 1대는 동북의 후영을 기습 진격했다. 관군은 동학군의 내습을 보부상의 첩보군으로 생각하였다. 황토현 상봉에 달한 동학농민군은 드디어 함성, 돌격을 신호로 전군이 호응하여 관군을 무찔렀다.”

  [김용덕, 김의환, 최동희 공저『동학혁명투사 전봉준』154~155쪽]



  황토현 전투의 재구성


  농민군이 4월 6일 천태산을 넘어 도교산에 집결하자 관군은 황토현에 진을 쳤다. 도교산은 천태산 동쪽 아래에 해발 57m의 구릉지로 관군이 유진한 황토현과는 서쪽으로 약 2km 거리에 있다. 앞에 해자 격인 하천(현 덕천천)과 평지 논이 있어 방어에는 유리하나 쌍방 모두 기습공격에는 부적합한 지형이어서 농민군은 황토현 남쪽 시목리 등 고 지대 등으로 분산 철수(이동)했다. 농민군은 분산하여 황토현의 관군을 3면에서 포위 형태를 이루며 대치하였다. 이 날 밤 관군이 야습해 올 것을 예측한 농민군은 황토현 남쪽 1.3~1.5km에 있는 세 봉우리(사시봉 해발76m를 중심으로 좌측에 91m고지, 우측에 68m고지)에 불을 밝히고 함성을 지르다가 자정이 되자 가운데 불만 남기고 모두 끄고 진영을 비워두고 매복하였다. 관군은 농민군이 잠든 것으로 알고 불이 꺼진 두 진영을 공격하자 매복해 있던 관군이 일시에 기습하여 관군을 섬멸하고 여세를 몰아 황토현 본진을 공격하여 관군이 패주하였다. 도망하는 관군은 부안에서 출동하여 매복해 있던 농민군에게 기습당하여 궤멸하였다. 여러 기록을 검토해보고 농민군 지휘부의 탁월한 전략의 구사 능력으로 볼 때 관군 선제기습 유도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정황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당시의 작전 추정도 참조)



당시 작전 추정도



  지형과 지명의 위치 검토


  두승산(444m)에서 북쪽으로 뻗은 두 지맥은 U자형으로 나눠져 하나는 천태산 쪽 좌측(서편)으로, 하나는 우측(동편)으로 뻗어 황토봉에서 그친다. 농민군의 본진이 있는 남쪽 고지대는 수개의 봉우리들이 밀집되어 있어 은폐와 매복이 용이하고 두승산 쪽으로 퇴각이 용이한 지역이다. 황토현에 진을 친 관군보다 유리한 지역을 농민군이 선점한 것이다. 전라감영군이 진을 친 황토현은 황토재로서 기념탑이 서 있는 해발 35.5m의 봉우리가 아니라 통행로에 있는 비탈진 고개로 지방도로를 내면서 잘라진 산등성이다. 관군은 이 황토봉을 중심으로 산등성이와 가정 마을과, 북쪽 돈지 마을 등 구릉지에 진을 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에 황토현을 둘러본 한 퇴역 장성은 이곳이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퇴로가 없는 지형으로 진을 쳐서는 안 되는 사지에 해당한다고 했다. 황토현 동쪽 기념관 앞에는 지금은 메워졌으나 당시에는 거무실 방죽이라는 깊은 저수지가 있었고 그 주변은 고라실 논으로 수렁논이었다. 관군은 배수의 진을 친 격이다.

사시봉은 현 기념관 뒤 남쪽 해발 76m의 봉우리로 시목리 바로 뒷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황토현 바로 아래 가정리 마을 고노들은 그 곳이 아니고 기념탑이 서 있는 황토봉을 사시봉이라고 다른 주장을 한다. 여기에는 한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데, 관군이 남쪽 고지대에 진을 치려고 하니 인근 주민들이 거짓으로 그 곳이 사시봉(死屍峰)이니 죽을 곳이라며, 일부러 진짜 사시봉인 황토봉에 관군이 진을 치게 하여 패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일대는 사시봉(死屍峯), 진두골(鎭鬪골)등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주는 지명이 많다. [고증 : 가정마을 이환수 씨 74세]


  황토현 동쪽에 있었던 거무실 방죽과 그 앞 거무실 마을의 거무실은, 거미 실 즉 거미줄을 말하는 것으로 거미줄에 먹잇감이 걸리면 꼼짝 못 하듯이 적을 유인하여 잡는 함정이라고 볼 수 있어 황토현 전승과 관련하여 흥미롭다.


  왜 관군은 황토현 사지에 진을 쳤을까? 거짓 패주하는 농민군을 얕잡아본데다가 유리한 고 지대를 농민군이 선점해버려서 고육책으로 낮은 황토현에 진을 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농민군)을 쫓아 고부 두승산에 이르렀는데 적이 산위를 점거하고 있어서 관군이 산 아래 있었다.”[남유수록] “병정들은 검사봉에 진을 쳤다가 패진했다 [석남일기]”라는 기록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문헌에 나온 시목리는 현 감냉이골 마을로 기념관 동남쪽 1.2km거리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은신과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농민군의 본진이 있었다.

지금 통칭하는 황토현 전투는 혁명 당시에는 고부접전이라고 했다. 화포장으로 황토현 전투에 참전했던 필자의 증조부(류희원 柳希源)는 전주화약 직후 정혼했던 아들의 혼례를 치르면서 “내가 고부접전에서 죽었더라면 이러한 영화를 못 보았을 것이다”하시며 기뻐하셨다는 말을 어린 시절 조모로부터 들었다.



  쌍방의 병력 규모와 장비


  농민군이 각 포에서 총동원한 인원은 8천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 그러나 야간 전투에 전 병력이 투입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4천여 명 정도의 동학군 정예군이 참가하고 나머지는 귀가하거나 예비병으로 다른 곳에 분산 배치되었을 것이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부 인민들은 평소에 단련이 업는니만치 별안간 공겁심이생겨 헤여지는 자 거지반이나 되고 다만 남어잇는 자는 동학군뿐이엿섯다.”(원문 철자대로 표기) 각 읍 무기고와 화약고를 확보한 농민군은 대창과 농기구만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며 상당한 양의 총검으로 무장한 것으로 보인다.


  “감영군의 주력은 전라도 각 고을에서 징발한 향병과 보부상들이 다수 포함되어 2천여 명의 군세를 이루었다.”[신순철, 이진영 공저『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보부상 부대 천여 명, 무남병(전라감영군) 700명, 토병(신병) 560명 도합 2,300여명이라는 기록도 있다.[동도문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보아 관군은 신무기인 양총을 일부 소지 한 것으로 보인다. “관병은 장구대진으로 여답평지로 쏘다저나려오며…(중략) 태인 화호리 나루가에 이르러 진을 치고 란포를 발하엿다. 무서운 신식 양총 소리는 천지가 진동하고 총알은 펄펄 나라 오리지나 거의 되는 백산 ㅺㅗㄱㅼㅏ기를 훌훌 넘어간다.” [오지영 동학사]



  농민군 전승의 배경


  농민군이 관군의 약 2배 정도 수적으로 우세했다고 하지만, 무기와 전투력에서 월등한 감영군을 대파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무엇보다 대의를 위한 사명감에 불탄 농민군의 결사항쟁 정신, 지휘부의 탁월한 전략과 병법의 운용, 민중들의 자발적인 지원 등이 종합되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이에 반하여 관군은 부패와 군기의 해이, 자만심 등이 패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특히 지형의 이점을 활용한 농민군의 전략이 돋보인다. “하늘의 이로움(기상, 계절)도 지리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의 이로움도 사람들의 인화만 못하다.”라고 한 맹자의 유명한 말을 농민군은 적절히 활용했던 것이다. 거짓 패한 척 황토현으로 관군을 유인한 전략은 바로 손자병법의 궤도(詭道-속임수) 중에서, “능력이 있지만 없는 것처럼 보여라(能而示之不能).”, “저자세로 상대의 교만을 부추기라(卑而驕之)라.”는 병법을 구사한 것이다.



  황토현 전투의 현장 조사 연구와 현장 보존, 발굴의 필요성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필수적으로 전쟁이라는 물리적 수단을 수반하고 전쟁의 승패가 바로 혁명의 성패로 연결된다. 그래서 전쟁 양상의 치밀한 해부와 연구가 혁명의 성격을 규명하고 이해하는데 실효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군사학적 연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세밀하고 정확한 객관적 기록이 부족하고 기록조차도 일치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은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시목리, 사시봉 일대에 대한 조사, 발굴과 보존도 필요하며 동학농민혁명 전쟁분야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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