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연구자와의 대화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이병규 박사가 말하는 대둔산 항쟁과 역사, 그리고 삶
대둔산, 전북 완주와 충남 금산 사이. 칼처럼 솟은 험준한 절벽 사이로 아득한 시간이 스며 있다. 1894년 겨울, 우금치 전투 패배 후 마지막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동학농민군이 남긴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현장을 또렷한 역사로 되살리고 싶은 이가 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이병규 박사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이병규 박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대둔산은 저에게 성지입니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공간이죠.”
이병규 박사는 원광대학교 사학과 신순철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발을 들였다. 문서로만 전해져 오는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항전지를 찾기 위해 대둔산 정상을 신순철 교수와 함께 올랐다. “처음엔 무서웠습니다. 죽겠더라고요. 고소공포증이 심했거든요. 그런데 신순철 교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절벽을 오르셨어요. 결국 저도 따라갔습니다. 눈으로, 발로, 온몸으로 역사를 확인하고 싶었으니까요.” 이 현장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 박사논문 「금산‧진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원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3년)가 완성되었다.
그는 잊힌 이 전장을 역사의 현장으로 되살리기 위해 수십 차례 절벽을 기어올랐다. 동시에 일본 외무성 문서, 주한일본공사관의 보고서, 지역 문집과 민간 전승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들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 이름들을 역사로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결정, 행동, 죽음이 단지 이름 석 자로만 남는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죠.”
발견되지 않은 현장을 걷다
문헌에는 ‘대둔산 항쟁’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항전이 있었던 날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서 그는 신순철 교수와 함께 수차례 산을 오르며 지형을 분석하고, 기왓장, 탄피, 구들 터 등의 유물을 확인했다. 대둔산 미륵바위 정상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암자나 거주지가 있었던 흔적도 발견됐다.
이 박사는 이를 단순한 군사적 거점이 아닌, 삶과 죽음이 교차한 공간으로 본다. “기와와 구들, 초막 3채. 그곳은 ‘잠깐 숨어든 곳’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담은 자리였어요.”
금산과 진산,
지역의 색깔이 만든 항쟁의 배경
대둔산 항쟁은 단순한 피신이나 전투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금산과 진산 지역의 뚜렷한 지역색과 갈등이 있었다. 금산은 인삼 유통과 보부상 조직의 중심지로 보수적이고 기존 질서 유지를 중시했던 반면, 진산은 천주교 전파와 민란이 잦았던 지역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강한 곳이었다.
“보부상은 유림과 결탁되어 있었고, 민보군으로 활동하며 농민군을 토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새로운 질서를 꿈꾼 농민군의 충돌이 대둔산에서 만난 것이죠.”
“절벽 위에서,
저는 사람을 다시 만났습니다.”
대둔산은 동학농민군 무장투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 장소이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서 현장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1894년 겨울,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고산과 진산(현재 충남) 사이, 수백 미터의 험준한 절벽 위에서 결사 항전을 준비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 미륵바위 정상에 초막 세 채를 짓고 30~50명이 머물며 장기전에 대비했다. 약 70일간 이어진 항전은 1895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기습공격으로 불과 몇 분 만에 20여 명이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 대부분은 지역 접주급 지도자들이었으며, 20대 임산부도 목숨을 잃었다. 김석순 접주는 한 살배기 딸을 안고 계곡 아래로 뛰어내리다 바위에 부딪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생존자는 단 한 명, 어린 소년뿐이었다. 너무나 험해서 오히려 원형이 보존된 이곳을 100년이 지나서 찾아낸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특정 지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특정 지역의 ‘위인 중심 서사’ 로만 전해지는 것에 늘 안타까움을 느낀다. 고부와 정읍의 중심 서사는 분명 의미 있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난 봉기 각각에는 고유한 지역 배경과 민중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둔산 항쟁은 금산과 진산 지역의 뚜렷한 색깔이 충돌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보수적인 보부상 중심지였던 금산, 그리고 천주교와 민란이 잦았던 진산. “이 두 지역이 맞닿은 대둔산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기득권과 새로운 질서가 맞붙은 전장” 이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죽기 위해 싸운 게 아닙니다.
살아가기 위해 싸운 겁니다.”
이병규 박사는 2005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 등록, 문화재 등록, 세계기록유산 등재 실무 등 현장과 정책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으로 활동하며 유물 10여 건을 문화재로 등록시켰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단순한 실적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역사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게 아니라 묻는 일입니다. 그들은 왜 싸웠는가? 우리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대둔산은 제게 성지입니다.”
“대둔산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현장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간입니다.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곳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마지막 이야기까지 서려 있는 곳입니다.”
그가 말하는 역사란, 과거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록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동학농민군은 단지 죽기 위해 싸운 게 아닙니다.
삶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죠.
그래서 대둔산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산입니다.”
이병규 박사는 기회만 되면 대둔산을 오른다. 무명의 동학농민군들이 마지막으로 움켜쥐었던 그 신념과 의지를 되새기기 위해. 설레고, 두렵고, 그러나 맑아지는 마음으로. 그에게 대둔산은 ‘성지순례’이자, 오늘을 살아낼 내면의 힘을 되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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