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날 꺾인 두 생, 끝내 지켜낸 한 집안의 의지
날짜 2025. 11. 4.(화)
장소 경기도 고양시
참여자 이여춘(1845. 6. 6. ~ 1894. 4.)
유족 이양호(이여춘의 고손자)

이양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여춘의 고손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이여춘 선생과 이병화 선생은 1894년 나주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였으나, 전투 패배 후 같은 날 순국하여 집안에 큰 슬픔을 남겼다. 특히, 이여춘 선생은 ‘무안 거괴(巨魁) 이여춘’으로 기록될 만큼 지역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던 인물로 보인다. 또한, 이여춘 선생의 이름은 ‘이여춘’, ‘이동근’, ‘이상술’ 등 여러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신변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손들은 선조의 이름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록을 신청하며 조상의 흔적을 끝까지 추적해 왔다.
1.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독자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우선 이렇게 먼 길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고조부 이여춘 할아버님과 증조부 이병화 할아버님의 후손인 이양호입니다. 현재 경기도에서 목회를 하고 있으며, 고향인 함평 진례(옛 무안현)에서는 「진례설화」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기 전에는 서울 혜화동에서 『문학신문』(1990)을 발행하기도 했었습니다.
2.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여춘 선생님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경기도 광주 이문 석탄공파 24대손으로, 이여춘 할아버님은 저의 고조부이십니다. 고조부님께서는 아드님이신 증조부 이병화 할아버님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습니다.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고조부님께서 무안현 진례지역에서 약 1,000여 명을 이끄신 동학농민군 대장(거괴)이셨다고 합니다. 두 분께서는 같은 날 순국하셨으며, 장례식 날에는 만사(輓詞)가 10리에 걸쳐 있었다는 이야기를 저희 어머니와 집안 어르신들께 자주 들었습니다. 집안에서는 고조부님을 ‘동학 대장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리고 있습니다.

2025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등록통지서 전달식
(왼쪽부터 신순철 기념재단 이사장, 이이호 유족, 오른쪽 정탄진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3. 집안 어르신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어릴 적부터 고조부님을 ‘동학농민군 1,000명 대장’으로 기억해 왔습니다. 또 어머니께서 호롱불 아래에서 노랫말처럼 들려주곤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부인동장씨비(烈婦仁同張氏碑)」의 주인공이신 우리 증조모 장지화 할머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장지화 할머님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남편과 시아버지가 같은 날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본인은 보쌈까지 당하는 극심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당시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두 아들을 지키려는 근성으로 고초를 이겨내고 있었는데, 꿈에 남편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보 여보, 나는 목이 잘린 아버지를 모시고 나주와 장성을 지나 북쪽으로 건너갈 것이니, 당신은 시방 어서 빨리 일어나서 동북 방향으로 가서 두 아들 잘 키우고 살면, 살구나무에 순이 나고 잎이 돋아나며 꽃이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날 반드시 있을 것이오. 어서어서 서두르시오.”
이 이야기는 「열부인동장씨비」에 기록되어 있고, 『호남누정총람(湖南樓旌總攬)』(1955)에도 남아 있습니다. 구전과 기록이 함께 가족의 기억을 지켜 주고 있습니다.
4. 2008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 등록을 신청했다가 불인정되었고, 2024년 다시 신청 하여 2025년에 인정받으셨습니다. 불인정 당시 심정과 재신청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등록을 신청할 때, 「열부인동장씨비」 사진과 전심전력으로 준비한 자료를 제출했지만, 역사적 입증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인정되었습니다. 당시 집안에서는 고조부님의 이름을 ‘이상술’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여러 이름을 사용하셨고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에 ‘이동근’, ‘이여춘’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는 일찍이 우리 고조부님을 ‘이동근’이라는 이름으로 참여자 등록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료에서 ‘이여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고조부님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집안에서는 족보의 ‘이상술’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어 ‘이동근’, ‘이여춘’이라는 이름이 동일인이라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2024년 집안 제적부에서 찾은 ‘이동근’이라는 함자는 더욱 생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가문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때 심정은 집안 어르신들의 신원을 회복시켜 드리지 못한 점이 죄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집에서는 ‘동학 대장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나라에서 인정 받지 못한 격이라 밖에서 언급하기 꺼려졌습니다. 그 후로 할아버지들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생전에 반드시 선대의 명예를 찾아드리자.” 이 일념 하나로 2번째 신청을 하였고, 마침내 2025년 고조부님과 증조부님께서 공식적으로 참여자로 인정되셨습니다.
5. 고조부님께서 여러 이름을 쓰신 이유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을까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입증을 위해 고조부님 이름을 제출할 때, 족보에 기록된 ‘이상술’만을 생각했던 것은 후손으로서 부족했던 점이라 생각합니다. 고조부님의 다양한 존함을 찾는 데 도움을 주신 무안문화원 정경탁 팀장님과 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조사관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 이름을 사용하신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름에 담긴 뜻을 중요히 여기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춘(汝春)’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준다’는 뜻이 아닐까 추측하고, ‘동근(東根)’은 동학의 근본을 살리려는 의지가 담긴 존함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6. 이여춘 선생님과 아드님이신 이병화 선생님의 활약상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1894년 음력 4월 6일, 무안에서 나주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여러 사료에서 이 전투를 이끈 인물이 ‘무안 거괴 이여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고조부님이십니다. 고조부님과 증조부님은 함께 이 전투에 참여하셨고 패배하여 음력 4월 26일 같은 날 순국하셨습니다. 고조부님은 나주 초토영(현 나주초등학교)에서 효수되었고, 증조부님은 무안읍에서 처형되셨습니다. 두 분이 같은 날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족보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조부 이병화 할아버님께서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신 이유는 세 형제 중 체구가 가장 크고 기골이 장대하셨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는 지혜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갑오군정실기(甲午軍政實記)』
7. 두 분의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는지, 묘소는 어디에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고조부님의 시신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효수된 목(머리)만 돌아왔다는 설, 다른 하나는 몸만 돌아왔다는 설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 집안 어르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관군의 눈을 피해 밤중에 장례를 치렀다는 말씀도 당숙부님께 들은 바 있습니다. 고조부님의 만사가 10리에 달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고조부님께서는 지역 사회에서 큰 신망을 쌓아오신 분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8. 동학농민혁명 참여로 인해 집안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나요?
어머니께 호롱불 밑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당시 관군이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후 증조모님께서 친정인 흥룡동으로 가셨지만, 거기서도 보쌈을 당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어찌 지난 시대의 어려움을 후손이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9. 아직까지도 집안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여러 차례 등록을 신청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후손의 본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저희 집안은 고조부님을 찾기 위해 2번에 걸쳐 기념재단에 참여자 및 유족 등록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열부인동장씨비」 비석만으로는 동학농민군으로 순국한 것인지, 동학농민군에게 희생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며 불인정을 받았습니다. 집안에서는 ‘동학군 대장 할아버지’로 기억해 왔기에 그 사실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선대가 목을, 그것도 두 분 모두 목이 꺾여 돌아가셨는데, 가만 두고 볼 후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다 우연히 무안문화원 정경탁 팀장님과 연이 닿아 긴 세월의 고생 끝에 우리 고조부님과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여자 등록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처럼 족보의 이름만 보지 마시고, 자(字), 호(號), 제적부의 이름까지 모두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에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여러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이는 기념재단에도 꼭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이양호,이이호(이여춘 참여자의 후손)
10. 동학농민혁명 명예 회복 관련 논의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십시오. 최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헌법에 명기하자는 의견부터, 2차 봉기를 항일 저항의 출발점으로 보아 2차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예우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정읍시처럼 유족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방안까지 다양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나 정치권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3·1운동의 기폭제요, 4·19혁명의 뿌리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근간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그 정신을 헌법에 새기는 것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유족 수당 관련 문제는 후손으로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 조상님께서 이루신 정의로운 역사에 혹여나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다만 국민 전체의 합의가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제도를 마련한 전북특별자치도와 정읍시에 감사드립니다.
2차 참여자 독립유공자 예우 문제는, 저희 할아버님들이 1차 참여자이시기에 구체적인 의견은 유보하고자 합니다. 모든 논의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 외에는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조상님의 유산으로 무슨 이익을 보려 하느냐”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혹은 정부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기념재단에서 지금까지 고군분투하며 참여자를 발굴해오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조부님과 증조부님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신 무안문화원 정경탁 팀장님처럼 개인적으로 자비를 들여 조사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기념재단에서는 이러한 분들을 지원할 방안을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양한 접근을 통해 더 많은 참여자를 발굴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저희 집안처럼 자료가 부족해 인정받지 못했던 사례를 기념재단에서 다시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기억해 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억울함과 참담함을 유족들이 겪지 않도록 더 세심히 살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유족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대담자: 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최두현, 정리: 기획운영부 임현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