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목차열기
2014년 봄 15호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

  두 번째 이야기


충남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서정복



  입법국민의회의 인민주권과 자유의 보장


  입법국민의회(Assemble nationale législative)는 제헌국민의회를 계승했지만 다시 헌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 번 더 혁명을 한 셈이었다. ‘1791년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프랑스는 공화제에 근접한 입헌군주제를 수립했다.


  이제 왕은 단지 국민의 최고 종복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이 행사하게 되었다. 헌법은 능동시민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능동시민은 25세 이상으로 현주소에서 1년 이상 거주하고 국민방위대에 등록되었으며, 시민법에 선서했고 하인 신분이 아니며 최소 3일간의 노동량에 해당되는 연간 2‒3리브르의 직접세 납세자였다.


  제2차 선거인은 150‒200일 노동량의 동산소유나 용익권자, 또는 100‒150일 노동량 가치만큼의 집 차용자, 400일 노동량의 재산을 소유한 농민 또는 소작인이었다. 당시 430만의 성인 남자 중 약 60%가 능동시민이었으며, 100명에 한 명, 151‒250명에 두 명의 선거인으로 선정되어 제2차 선거인은 모두 4만 명이었다. 현마다 세 명씩 선출되어 745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의회는 바툴 의장의 주재로 1791년 10월 1일에 개회했으며,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푀양파 264명,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적 공화주의의 자코뱅파 136명, 온건한 공화주의의 지롱드파 345명으로 구성되었다. ‘1791년의 헌법’은 구제도를 완전히 허물지 못했고, 다만 가진 자들의 지배를 보장했다는 의미에서 ‘부르주아 시민헌법’이었다.


  의회는 단원제 체제였고 2년을 임기로 하여 재산에 따른 제한선거로 이루어졌다. 의회는 상설이고 불가침권 및 법안제출권을 가졌다. 그리고 장관들에 대한 회계 감사권을 행사하고, 국가의 안전 및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국가최고법원에 기소하며, 외교위원회를 통해 대외정책을 조정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재정 문제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고 왕으로부터 독립되어 운영되었으며, 국가에 긴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군사적인 조치까지 취할 수 있었다.



  국민공회의 상퀼로트에 의한 공화정과 공포정치


  7월 11일, 입법국민의회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음을 선언하고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하도록 범국민적 운동을 전개했다. 마르세유에서는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 알자스에서 작곡한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를 힘차게 부르며 파리로 행군했다. 이 혁명가는 1795년에 프랑스의 ‘애국가’로 채택되었으나 1815년 이후 한동안 폐기되었다가 1879년에 다시 ‘애국가’로 복원되었다.


  국왕의 바렌 탈출 실패와 더불어 1792년 7월 말부터 거세진 반 국왕운동을 구실로 의회는 왕권을 폐지하고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의 설립을 결의했다.


  8월 9일에서 10일 밤까지 파리는 혁명의 열기 속에 휘말려 4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8~9월에 상퀼로트가 지배하는 새로운 파리시 코뮌이 제1차 공포정치를 실시하자 왕당파들은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파리의 각 구에서는 감시위원회가 구성되어 가택수색이 이루어졌고, 500명 정도의 ‘혐의자’가 체포되었다.


  혁명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혁명 모자(프리지아), 자유의 아버지 초상, 자유의 나무 등의 상징물을 부각시켜 혁명 정신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막대기 묶음에 도끼를 끼운 로마 시대의 권표(faisceaux)와 같은 장식물과 브루투스, 카토 등과 같은 공화주의자들의 애국심을 대입시켰다.¹ 


  국경지대의 허술한 틈을 타고 프로이센군이 침공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메츠군을 지휘하던 켈레르망 장군과 뒤무리에 장군이 합세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 군을 몰아냈다. 상퀼로트로 구성된 프랑스군이 전투에 승리하자 괴테의 말과 같이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1792년 9월 21일에 보통선거로 뽑힌 749명의 새 의원들이 혁명정부를 이끌었다. ‘국민공회’는 소집되자마자 왕정을 폐지하고, 다음날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달력을 버리고 새로운 ‘공화력’을 채택했다.


  왕정이 폐지되면서 왕의 초상화도 파기되었다. ‘국민공회’는 제1공화국을 선포하고 국새에 새길 프랑스 혁명의 표상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구현해냈다. 즉 여성의 풍만한 육체를 이용해 혁명의 이미지로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창을 든 ‘마리안, Marianne’을 탄생시켰는데, 프리지아 모자는 ‘자유’를, 거울은 ‘진실’을, 곡식다발은 ‘농업’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리안은 공화국과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서 당시 가장 많이 선호되고 있던 마리Marie와 안Anne이라는 이름을 합한 것이었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쿠통 등을 주축으로 한 자코뱅이 주도했다. 자코뱅이 집권당시에는 600개, 1793년에는 800개, 1794년에는 2000개의 클럽으로 증가했다. 자코뱅은 산악파, 혁명정부, 공포정치를 주도했다. 자코뱅의 힘은 전국에 설치된 지부와 파리 상퀼로트의 위세에서 나왔다.


  자코뱅은 혁명의 슬로건을 대불동맹과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키려고,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과 걸맞게 “조국애・평등・자유”로 바꾸었다.


  초기 국민공회는 160명에 불과한 지롱드파가 이끌었으나 사실상 그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는 어려웠다. 1793년 6월, 바래르, 시에예스 등 소택파의 지지로 다음해 7월까지 산악파가 의회와 혁명정부를 주도했다.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이 이끄는 산악파는 상퀼로트의 운동에 적극적인 찬사는 보내지 않았지만, 그들을 후원하고 교우하면서 공포정치를 전개했다. 12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미라보와 엘베시우스의 흉상을 파괴하고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일반의지론을 정치원리로 활용했다.²


  ‘국민공회’ 제4대 의장, 베르트랑 바래르는 인민을 배반한 루이 16세에게 42가지의 질문을 던져 심문했다. ‘국민공회’는 루이 16세를 인민의 소집 없이 재판하고, 인민의 이름으로 1793년 1월 21일에 단두대에서 처형하자 군중들은 환호의 뜻으로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왕이 처형된 ‘혁명 광장’은 오늘날 ‘콩코르드 광장(화합의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왕의 처형으로 혁명은 끝이 나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방데 지방 농민들이 1793년 30만  징집령을 계기로 왕당파들이 응집해 ‘올빼미당,chouannerie’과 합세해 게릴라 형태의 대대적인 반란(1793~1795)을 일으켰다.


  각국의 군주들도 루이 16세의 처형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비교적 온건한 영국의 피트 수상조차 대불동맹에 앞장섰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독일, 이탈리아의 제후들과 러시아, 에스파냐 왕이 가담하면서 프랑스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82명의 의원들을 각 지방에 파견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징병을 독려하면서 혁명 추진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특히 보르도의 탈리앙, 릴의 르봉, 리옹의 푸셰, 콜로 데르부아, 낭트의 카리에 등은 징병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따라서 1793년에 63만, 다음해 여름에는 80만 명의 군대가 확보되었다. 군대는 마르세유, 보르도, 리옹, 툴롱, 방데 등지에서 전승을 거두어 혁명정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당시 35세의 젊은 로베스피에르는 산악파를 주축으로 상퀼로트와 평원파의 지지 아래 국민공회, 혁명재판소, 공안위원회, 치안위원회 등 혁명추진에 필요한 기구들을 장악했다. 그는 의회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청렴공,L’incorruptible‘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평화 시대와 달리 혁명 시대에는 ‘공포’가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독재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혁명정부로 난국을 타개하려고 상퀼로트의 힘을 끌어 들여 혁명의 효과를 배가시키고자 했다. 1793년 9월 5일, ‘국민공회’는 의회를 점거한 상퀼로트의 위협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공포정치’를 의제로 삼았다. 특히 혁명재판소에서는 반혁명범죄자를 다루었는데, 이른바 ‘카니발재판소,tribunal de cannibales’를 설치하여 일단 판결을 내리면 피고는 상소하거나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었다. 재판장 에르망과 악명 높은 푸키에 탱빌은 파리에서만 1만 7000명을 처형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빵 가격 인하, 제품 가격 및 임금의 공정화, 국유재산 분할 및 매각 등의 조치를 취했고 아씨냐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게 했다.


  1794년 3월 말 그는 반혁명분자로 당통과 관용파를 체포해 처형함으로써 불안요소들을 제거하고 공포정치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극단적인 자코뱅들에 대한 반감과 함께 탈중앙집권과 공화국의 생존을 중요시하는 그룹의 성장으로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고 공포정치가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것은 민중들의 염원을 의회가 수용하여 주권재민 사상을 기반으로 혁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모델은 그리스의 민주정과 로마의 공화정이었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목표였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1793년 헌법의 전문이 되었고, 1958년 프랑스 헌법에 통합되어 오늘날까지 프랑스 민주공화정의 정치원리가 되고 있다.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파괴와 건설, 공포와 평화, 학살과 정권교체, 탄압과 자유, 독재와 공화, 좌파와 우파 등 서로 상반되고 얼룩진 상황으로 혁명에 혁명을 거듭하며, 대불동맹군의 침입 속에 나폴레옹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혁명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근대 시민국가・자유 민주국가를 탄생시키는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 Jean de Viguerie, “Eglises et Pouvoir Politique”, Actes des Journes Internationales d’Histoire de Droit d’Angers, 30 mai 1er juin 1985, Angers, pp.333‒334.

 2) “Ddicace de Maximilien Robespierre aux mnes de Jean-Jacques Rousseau”, dans Charlotte Robespierre et ses Moires, par Hector Fleischmanne, Albin Michel Editeur, pp.290‒292.



정기구독 신청

발행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COPYRIGH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2025년 겨울 62호
목차
目次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