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 서남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
성균관대학교 교수 배항섭
배상옥, 전라도 무안에서 일어나다
오지영이 쓴 『동학사』에는 제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출신의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제일 앞머리에 배규인(裵圭仁), 배규찬(裵奎贊)을 들고 있다. 배규찬은 배규인의 동생이다. 배규인은 본관이 달성이며 보명(譜名)은 규옥(圭玉)이고 공문서에는 규인(奎仁, 圭仁)으로 기록되었으나, 동학농민혁명 전후에는 상옥(相玉)으로 통칭되었다. 배상옥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당시 무안현 삼향면 대월리로 현재의 목포시 대양동이다. 배상옥은 달성 배씨의 집성촌인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에서 살다가 선대에서 대월리로 이사했다. 그가 구전에 따르면 배상옥은 기골이 장대했으며, 그 집안은 1000석꾼으로 지붕 처마자락에 풍경을 달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부자였다고 한다.
「순무선봉진등록」에 따르면 무안은 “농민군의 소굴[匪類之巢穴]”이라고 할 정도로 거괴가 많았다. 그중 배상옥․배규찬 형제는 무안의 “거괴”로 전라 서남부 연해지역에서는 “괴수자(魁首者)”라고 칭해 졌으며,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무사이규태왕복서(宣撫使李圭泰往復書)」에는 “부내 비류에는 각 접이 있고 접주는 즉 그 우두머리이다. 이를 크기에 따라 대소별로 나눈다면 무장의 손화중과 무안의 배상옥은 각각 수만의 포중(包衆)을 포용하고 있어 전봉준․ 김개남보다 몇 배나 더 크다. 그러므로 만일 그 거괴(巨魁)로 논한다면 당연히 손화중과 배상옥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최경선, 오권선, 이사명, 남응삼, 이방언 등 10여명에 이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성 전투와 고막원 전투를 거치며
배상옥이 이끄는 무안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집강소 시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전주성을 점령해 있던 농민군은 5월 8일 관군 측과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고 철수하게 된다. 전주에서 해산한 농민군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안 일대는 배상옥이 통할하였다. 무안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된 장소는 청천리 소재 달성 배씨의 사당인 청천재 혹은 달성 배씨의 재실로 알려져 있다. 배상옥이 이끄는 서남부 지역 농민군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탐관오리와 불량한 토호들을 징치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은 목포, 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 등 호남 서남부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하며 활동하였다.
제2차 기포 때도 무안에서는 배상옥이 2천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상옥이 전봉준과 함께 북상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후 배상옥은 역시 북상하지 않고 광주에 웅고하고 있던 손화중,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합세하여 나주성 공격에 나서게 된다. 손화중은 10월 21일부터 나주 수성군과 침산과 선암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여 광주로 후퇴하였다. 11월 초에는 광주에 있던 손화중과 최경선, 나주의 오권선 뿐만 아니라 무안의 배상옥도 연합하여 나주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이 이끄는 동학군은 북쪽 지역에서, 무안의 배상옥은 서남쪽 함평 고막포에서 동시에 나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무안 대접주 배상옥은 나주를 향해 진격하여 11월 17일 무렵 나주 외곽 30여리 지점에 있는 고막원(古幕院) 주변에 진을 쳤다. 나주목사 민종렬은 나주 수성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18일 아침 고막원 동쪽 청림산(靑林山, 多侍面 文洞里)과 호장산(虎壯山, 虎長山, 多侍面 松村里), 진등참(多侍面 東谷里 文洞里)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들이 대포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였으며, 추적해오는 관군을 피해 고막교를 건너던 농민군들은 마침 밀려온 조수로 물이 넘치던 다리 밑으로 빠져 죽기도 했다.
나주초토영에서 잠들다
이후 배상옥이 이끌던 농민군은 대월리에 집결하여 장흥전투에 합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미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영암 등지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피신한 배상옥은 해남의 바닷가인 은소면(현재 송지면)의 한 마을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12월 24일 장정들을 데리고 공격한 윤규룡(尹奎龍)에게 잡혀 관군에게 넘겨졌다. 당시 배상옥에게는 그의 위세를 말해주듯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일천량이라는 거금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고, 배상옥의 마부 김종곤(金鍾坤)과 그의 수종 윤석호(尹石浩)․윤문여(尹文汝) 등이 그날 함께 체포되었다. 이규태는 배상옥을 나주 초토영으로 보내지 않고 현지에서 처형하였다. 그가 해남에서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중들은 애달픈 심정을 이기지 못해 “상옥아 상옥아 배상옥아, 백만 군대 어디 두고 쑥국대 밑에서 잠드느뇨”라는 민요를 숨어서 불렀다 한다. 혈육으로는 당시 여섯 살이던 딸 하나가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숨겨서 키워 같은 마을(대월리) 전주 이씨 집으로 출가하였으며, 외손인 이성동의 아들 이영귀가 현재 생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