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기포茂長起包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의미
무장기포의 의미는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이 1894년 3월 20일 전라도 무장 당산마을에서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포 조직을 일으켜 봉기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무장은 지명 즉 장소를 설명하고 있고 기포는 이 역사적 사건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무장의 현재 행정구역은 고창군 무장면으로 고창군에 속하고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시대에는 무장현으로 고창현이나 흥덕현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이 합쳐져서 고창군이 되었다. 따라서 전봉준과 손화중이 포고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준비한 당산마을이 1894년에는 무장현에 속하였기 때문에 장소적 의미를 무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포(起包)는 포 조직을 일으켰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포(包)는 동학조직을 말한다. 동학의 조직은 접(接)과 포(包)로 설명된다. 접은 동학조직의 기본단위로서 교도들 사이의 인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한 접의 규모는 대략 가구 수로 35∼75호였다고 한다. 이를 4인 가구로 환산해보면 140명∼300명으로 이 같은 접의 책임자가 접주(接主)였다. 접이 늘어나 한 사람의 접주가 여러 개의 접을 거느리는 대접주(大接主)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들 대접주가 관할하는 중간조직이 바로 포(包)였던 것이다. 당시 손화중은 대접주로서 고창, 무장, 흥덕, 영광, 함평, 장성, 정읍 등 당시 전라도 서부 대부분의 동학조직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 사건을 ‘무장기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전개
고부농민봉기 이후 고부를 떠난 전봉준은 무장현의 손화중을 찾아갔다. 전봉준은 손화중에게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자고 설득하였다. 전봉준의 설득이 계속되자, 손화중은 마침내 봉기를 결정지었다. 고부농민봉기 단계에서 도모했던 확대된 봉기가 실현되는 순간이자, 농민혁명이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드는 대목이었다. 1894년 3월 16일 무장현 동음치면 구암리 당산마을 일대에 손화중 휘하의 동학농민군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3일 동안 죽창을 만들고 민가에서 무기류를 빼앗아 오는가 하면, 동학을 반대하는 자들을 잡아다 처벌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이 같은 행동에 당황한 무장관아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설득하여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은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가겠다’는 통보로 관아의 지시를 일축하였다. 무장관아의 힘으로는 수천명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준비를 마친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서 무장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무장현을 떠난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3월 21일 고창현을 거쳐 22일 흥덕현의 사포와 후포, 23일 부안현 줄포를 지나 고부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부군을 점령하고 향교와 관청 등에서 하루를 머문 다음, 24일 고부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집과 나라를 이루어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보좌하여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堯舜)의 교화와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를 해를 보는 것처럼(분명하게)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된 선비의 간언을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신하를 비도(匪徒)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만 득실대니 인민(人民)들의 마음은 날로 더욱 나쁘게 변해 가고 있다. 안으로는 삶의 즐거움이 없고 밖으로 제 한몸 간수할 방책이 없다. 학정(虐政)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했는데,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公卿)으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고,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저자거리로 만들었다.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나라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란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륙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수령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이치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遺民)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가히 앉아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온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노니, 오늘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성군(聖君)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동학 무장포고문
무장포고문에 담긴 의미
무장포고문의 발표는 전봉준과 손화중이 전국적인 농민항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조선전역에 공개적으로 천명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포고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방향이 어디에 있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포고문을 실제 누가 작성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생각이 반영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전봉준은 이 포고문을 통해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당시 조선의 구성원이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포고문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관점은 1894년 당시 조선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 전봉준은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참고문헌
김은정·문경민·김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출판, 1995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