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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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15호
동학농민혁명에서 독립운동까지 끊이지 않는 구국정신

  동학농민혁명에서 독립운동까지 끊이지 않는 구국정신


참여자 김홍기의 증손 김동규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동학의 성지이며 김개남 장군이 대도소를 세웠던 남원에서 이를 증명해 주신 분들이 바로 김동규 선생님의 선조님들이다. 선생님의 김홍기 증조부와 김종문 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백산봉기, 전주성 입성 등에 함께 하셨으며, 재봉기 당시에는 김개남 장군이 떠난 남원에 남아 방아치에서 민보군을 상대로 격전을 펼쳤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숙조부께서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인근지역에 전달하셨으며, 부친께서는 야학을 통해 동네 청년들을 가르치며 계몽운동과 애국심 함양에 앞장서셨다고 한다.

  현재도 선조들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이어나가고 알리기 위해 왕성히 활동하시고 있는 김동규 선생님을 뵙고 정말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문) 김동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의 동학 대접주였던 김홍기 증조부님과 그 분의 아들 김종문 조부님의 후손 김동규입니다. 저희 집안은 원래 임실에서 거주하였으나, 숙조부님 때부터 남원에 자리 잡고 계속 살아오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님과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은 어떤 활동을 하셨을까요?


답) 증조부께서는 1889년 장인으로부터 도를 전수받아 동학에 입도하시고 처음으로 남원에 동학을 전파하셨습니다. 왕성한 활동으로 5천호 이상에 포교를 하셨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접주가 되셨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최시형 교주가 임실의 최승우 교구장에게 동원령을 전달하자 그분께서 매부지간이던 저희 증조부님께 연락을 취해 임실과 남원이 동시에 기포하였습니다. 이후 남원의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봉기와 전주성 점령 등 동학농민혁명 전반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김개남 장군의 남원 입성 이후에는 집강소를 통해 남원지역을 통치하셨겠지요. 재봉기로 인해 김개남 장군이 북상한 후에는 주력농민군의 걸림돌이 되어오던 박봉양 민보군과 남원의 농민군들이 격전을 벌였던 방아치 전투에 참여하셨습니다.


  김종문 조부께서는 아직 15세라는 어린 나이였기에 동학농민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 증조부님을 보좌하거나 연락책으로 활동하셨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문) 두 분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어느 분께 전해 들으셨나요?


답) 대체로 조모님께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천도교인 분들 중 증조부님을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께서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제가 소장하고 있던 남원군 종리원사는 증조부님의 활동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된 자료입니다. 이렇게 구전과 자료를 통해 증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어떻게 참여하셨고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문) 남원군 종리원사를 기념관에 기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소장하게 되셨으며 어떤 내용이 담겨있나요?


답) 남원군 종리원사는 남원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유태홍 씨의 구술을 최병현 씨가 정리하여 작성한 것으로, 제가 그 내용을 전해 받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종리원사는 남원의 천도교 운영장부와 동학농민혁명사를 합본한 책 한권과, 순교약력이라는 별책 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원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이 모두 기록된 것이지요. 저는 이 종리원사가 학자들의 손에 의해 연구되어 남원의 동학농민혁명사가 더욱 자세히 밝혀지고, 더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원본을 기념관에 기증하였고, 현재는 복사본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종리원사의 연구를 통해 남원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연구는 물론, 동학농민혁명 유족 분들도 많이 밝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님과 조부님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요?


답) 김개남 장군이 북상한 이후에 남원에서 벌어졌던 최대의 전투인 방아치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남원의 농민군들이 패배한 후, 남원성에서 진열을 가다듬어 방어하였으나 역시 패배하고 말았고 이들을 지도했던 증조부님께서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셨습니다. 조부님은 15세라는 어린나이였기에 투옥되시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는데 혼자 집에 돌아갈 수 없었는지 옥사 옆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역적의 자손을 도와주면 자신들이 해를 입을까봐 두려워서였는지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았습니다. 조부님께서는 엄동설한에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도 마땅하지 않은 채로 노숙하게 되셨고, 동상과 기아로 많이 쇠약해지셨지요.


  결국 증조부께서는 남원 장터의 임시형장에서 공개처형 되셨습니다. 조부님께서는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셨다고 하니 정신적인 충격 또한 만만치 않게 받으셨을 겁니다. 이후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밤에 몰래 찾아와 증조부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조부님을 들쳐업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증조부님은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어 절차 없이 매장되셨고, 조부님은 고된 생활에 몸이 견디지 못해 시름시름 앓으시다 3개월 뒤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증조부님이 총살되신 것을 직접 목격하셨다는 분을 뵙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해마다 그분께 세배를 다녔는데, 찾아뵐 때마다 증조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문) 집안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분도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답) 네, 저희 숙조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숙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3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게 되었지요. 그러나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었는지 숙조부께서도 20세 쯤 되어 천도교에 입도하여 수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자 임실에 살고 있던 숙조부께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단신으로 장성, 구례까지 전달하셨습니다. 당시는 교통편도 없었기 때문에 하루에 50km이상 걸으셨고, 밤에는 천도교 교인의 집에서 묵으셨다고 합니다. 순천까지 독립선언서를 전하려고 하셨으나 감시가 심해져 전달하지 못하고 임실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검문이 더욱 심해져 산길을 이용하고, 담양의 대나무를 사서 장사치처럼 행세하여 검문을 벗어나곤 하셨으나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주에서 망명 생활을 하셨습니다. 가진 것도 없어서 쌀, 소금 장사를 하며 떠도는 생활을 하시다 남원에 정착하게 되셨지요. 저희 집안은 그때부터 계속 남원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친께서는 좋지 않은 집안사정에도 불구하고 남원에 딱 하나 있던 초등학교를 나오셨습니다. 당시에는 초등교육도 받은 이들이 드물었기에 20세 무렵에는 구청에서 부친을 행정서기로 특채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녹을 받으며 살지는 않겠다고 거절하셨지요. 이후 부친께서도 천도교에 입도하셨으며, 동네에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모아 야학을 통해 교육시키시고, 계몽운동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항일정신을 심어주셨다고 합니다.



문) 증조부님과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답) 동학농민혁명은 말 그대로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봉건제도의 압제에 핍박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한 것이지요. 증조부님께서는 부족함 없이 사시는 분이셨지만 누군가가 하라고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또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정신으로 국가의 위기에 맞서 울분으로 일어나신 것입니다. 비록 성공한 혁명은 아니더라도 민족의 자긍심을 위해 나서셨던 그 분들의 뜻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뜻과 숭고한 정신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주고 공감해 주기를 바랍니다.



문) 재단에 바라는 것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제가 바라는 것은 크게 없습니다. 그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들이 선조 분들에게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하여 재단에서 계획 중인 선양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더 많은 이들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에 공감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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