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첫날의 기억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 송찬섭
갑오년의 첫날을 오키나와에서 맞았다. 개인적으로는 외국에서 새해 첫날을 맞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동학농민혁명에 관심 있는 연구자로서 오래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갑오년에 대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차라 비록 양력이지만 갑오년의 새날은 새로웠다. 사실 근현대사에서 동아시아는 일제에 의해 침략과 지배, 학살을 당한 지역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그 핵심현장의 한쪽이 한반도라면 또 다른 한쪽이 오키나와일 수 있다.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에 의해 지배를 당했지만,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함으로써 더 이상 일본지배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갑오년은 우리 못지않게 중요한 해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는 말처럼 동아시아의 다른 한쪽에서 우리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주로 근현대사를 기념하는 공간을 찾아 나섰다. 관광지가 아니어서 재일교포 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서승이 쓴 ‘동아시아 평화기행’을 많이 참고하였다.
오키나와는 무엇보다도 일제의 지배와 전쟁강요, 이에 따른 미군의 공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오키나와에는 희생자에 대한 기념비와 추도 시설이 많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식의 차이는 크다. 일제의 무모한 제국주의전쟁과 천황제 호지(護持)를 위한 아시아 민중의 희생으로 보는 시각과 서구제국주의에 의한 일본의 희생이나 국가(일본)와 민족을 위한 국민의 산화, 옥쇄로 보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오키나와전투의 최종전투지였던 곳에 세운 드넓은 평화기념공원이다.
이른바 평화기념공원은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복귀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됐다. 일본의 초대 총리이자 일본제국의 추축(樞軸)이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초대총재와 전범 기시 노부스께(岸信介)의 남동생인 사또오 에이사꾸(佐藤榮作) 2대 총재를 사업자로 추대하고 오키나와 군사령관이었던 우시지마 미쓰루(牛島 満)가 자살한 마부니(摩文仁)에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서승 선생은 평화기념공원이 아니라 전범기념공원이라고 비판하였다. ‘평화의 역설’이 벌어지는 가운데 평화기념공원 안에 희생자 20만명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검은색 위령비를 줄지어 세워 놓았다.
‘평화의 초석’이라고 부르는 나지막한 비석에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새기고 기념관을 통해 기억의 현재성과 연속성, 그리고 류큐(오키나와)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공원 한쪽 한국인 위령탑에는 유신시기였던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위령탑 근처에는 이은상 시인이 지은 ‘영령들에 바치는 노래’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었다. 희생자들이 희생당한 시점이나 희생을 애도하는 시점, 어느 쪽을 봐도 별로 진정성이 없는 듯하여 논란 많은 우금치의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연상되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조총련에서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자 유신정부에서는 ‘오키나와 침투를 기도하는 북괴의 책동을 봉쇄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서 먼저 제작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전투의 중요 전적지의 하나였던 가카즈 고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지인 고부 백산처럼 별로 높지 않지만 주변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새지였다. 지금은 후텐마 미군 기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세워 놓았는데, 이곳에서도 몇 개의 수상한 위령탑이 보인다. 이를테면 독도 때문에 잘 알려진 시마네현에서 세운 ‘시마네의 병(兵)이 분전(奮戰)한 곳’이라는 기념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몇 개 되지 않는 위령탑 중에 ‘한민족 출신 오키나와전 전몰자 위령 청구지탑(靑丘之塔)’이 있었다. 서승 선생은 탑을 세운 일본민주동지회라는 조직을 잘 알 수 없고, 아랫돌에 새겨진 문구도 석연찮다고 보고 있다. 혹시나 해서 일본사 전공자에게 물어보니 일본민주동지회는 1971년 조직된 우익단체이며, 대표인 마쓰모토 아키시게(松本明重)는 만주의 스파이 역할을 하다가 전후에는 정계 브로커를 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한민족’ 희생자를 위로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서승 선생은 “이데올로기와 국경, 민족을 초월하는 척하지만” 본질은 “일본의 전쟁범죄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주체와 목적에 따라 기념의 해석은 상이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그간 숱한 책자가 간행되고, 기념공간과 기념비가 만들어졌지만, 아직 만족스럽지 않은 듯하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동학농민혁명을 사회적으로 기억하기 위한 노력은 대단히 미흡하다. 일례로 기억을 공유하고 전승하기 위한 제대로 된 역사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없거나 있다 해도 초라한 수준에 지나지 않다. 이 부분은 오키나와 현립박물관, 히메유리평화기념자료관과 비교한다면 좋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노래, 연극, 영화 등이 충분하게 제작,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 중요한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는 기억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게 아닐까 우려스럽다.
10여년 전 전주에서 열린 107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 때였다.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지만, 시민의 호응은 크지 않았다. 국제학술대회에서도 청중이 적었는데 유독 일본에서 온 청중은 한국인보다 많아 보였다. 아마도 국제학술대회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회의한국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당시 한 할머니가 앞자리에 앉아서 돋보기를 쓰고 열심히 자료를 읽는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들 일행은 바다를 건너 먼 길을 왜 왔을까? 우리에게는 혁명적 사건이요, 봉건세력에 대한 저항, 침략세력에 대한 전쟁이지만, 그들로 봐서는 바로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사건이기도 하다. 결국 이 사건을 현재화하는 일과 민간의 연대만이 동아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을 제대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서 이를 대하는 양상이 많이 달라질까? 여러 가지 우려 속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상징성이 커진 갑오라는 간지를 통해 1894년과 2014년이 서로 호응하는 분위기를 보면서 나름대로 새롭게 기대를 해본다.
저자약력
서울대학교 인문대 국사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석,박사
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