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대흥 관아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106-1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30일 봉기하여 10월 1일에는 서산관아와 태안관아를 점령하였다. 지금의 예산군인 대흥지역에서는 10월 7일 박덕칠의 예포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대흥관아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내포지역은 홍주목을 제외한 대분의 관아가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되었다. 대흥관아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동헌과 일부 건물이 남아 있다. 대흥관아는 1979년까지 대흥면사무소로 사용되다가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바로 옆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양상 (1)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포지역 전체를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에는 홍주목(지금의 홍성군)이 관활한 충남 서천에서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20여개 고을을 내포지역을 일컬었음을 볼 수 있는데, 현재는 일반적으로 홍성·해미·서산·태안·덕산·예산·신창·면천·당진 등을 내포지역이라고 말한다.
내포지역의 동학(東學) 전파는 1883년 박인호, 박희인을 통해 이루어져 1892년 가을부터 1893년 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공주취회·광화문 복합상소·보은취회)에도 참여했음이 알 수 있다. 그러나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봄 전라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던 시기에는 활발하지 않았다. 이는 충청도 각 관아에서 극심하게 동학을 탄압했던 점과 동학 교단(북접)에서 계칙문(戒飭文), 금석지전(金石之典) 등을 내려 농민봉기를 단속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양상 (2)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아산만으로 청국 군대가 들어온 뒤 서해상에서 시작된 청일전쟁과 관련이 깊다. 1894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점령하고 친일내각 수립한 후 청일전쟁을 도발하자 집강소 활동을 펼치던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삼례에서 2차 봉기를 단행, 반일항전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충청도 각 관아의 극심한 탄압과 동학 교단(북접)이 봉기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월 18일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내린 교유문(청산기포령)이 9월 30일 예산에 도착한 뒤 활발해졌다.
9월 그믐날 내포지역 곳곳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10월 1일 수천 명이 서산관아를 공격하여 군수 박정기 등을 참수하였고, 태안지역에서도 수천 명이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 300여명과 관군, 유회군(儒會軍) 등의 연합부대가 10월 11일부터 농민군을 공격하여 농민군의 기세가 꺾였으나 10월 24일 5만 여명의 동학농민군이 면천(沔川) 승전곡에서 일본군 후비보병 서로군의 1개 소대와 2개 분대를 격파하면서 상황을 반전(反轉)시켰다. 그 여세를 몰아 동학농민군은 25일 구만포전투, 신례원 관작리전투 승리 후 예산관아를 점령, 27일 삽교를 거쳐 28일 오후 4시경에는 홍주성을 포위·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3만여 명이 전사하여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이 잦아들고 말았다.
예포대도소 터


예포대도소 터 안내판 예포대도소 터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성리 410-7, 410-10 일대
1894년 9월 30일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후 예산 목소리(혹은 목시)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지휘본부로 사용하였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현재의 위치를 조사·확인하고 ‘예포대도소(禮包大都所) 터’라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내포(예산)지역의 주요 동학농민혁명 일지
1894. 2. 15. : 덕산봉기(고덕지역 동학농민군, 내포지역 최초봉기)
1894. 9. 18. : 일본군, 조선정부에 농민군 진압 협조 최후통첩, 해월 최시형 동학교단 전국 대동원령(청산기포령)
1894. 10. 1.~10. : 동학농민군 태안·서산관아 점령, 구만리·예산기포, 예포대도소 설치
1894. 10. 21. : 목천 세성산전투 참가, 동학농민군 패퇴
1894. 10. 22. :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총집결(운산 여미벌)
1894. 10. 24. : 면천 승전곡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
1894. 10. 25. : 북상을 위해 동학농민군 신례원 관작리 집결(3만여 명)
1894. 10. 26. : 관작리전투, 동학농민군 관군을 상대로 대승(大勝)
1894. 10. 28.~29. : 홍주성전투, 동학농민군 관군에게 패배
1894. 11. 5. : 죽산부사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 부대 예산군 입성.
1894. 11. 7.~8. : 해미성전투, 매현전투(서산)에서 동학농민군 패배
1894. 11. 12.~ : 일본군 인천수비대 태안·서산지역 농민군 수색·참살
1894. 11. 15. : 일본군 인천수비대, 태안·서산지역 농민군 색출 체포
1894. 11. 16. : 태안백화산 교장바위에서 체포된 동학농민군 처형
1894. 11. 18. : 일본군 인천수비대(山村부대) 덕산에서 인천으로 철수
1894. 12. 23. : 순무영, 충청도 도접주 농민군지도자 안교선(安敎善) 효시
송산리 동학농민군 우물 터


동학농민군 우물 터 안내판 동학농민군 우물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송산리 91, 92 일대
반일항전(反日抗戰)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면천 승전곡전투를 통해 일본군을 제압하고, 관작리에서 관군·유회군·향병을 다시 물리친 후 예산관아를 점령하였다. 이후 예산에서 삽교를 거쳐 홍주성으로 향할 때 역촌(현재의 삽교읍 역리, 송산리) 일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당시 송산리에는 두 곳에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 곳만 남아 있다.
역리, 동학농민군 주둔지


역리, 동학농민군 주둔지 안내판 역리, 동학농민군 주둔지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역리 125-23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주성 공격에 나선 농민군이 예산에서 홍주로 향하던 중 하루를 유숙하며 주둔한 곳이다. 동학농민군이 역촌(현재 역리) 뒤뜰과 천변 등지에서 유숙한 사실은 「양호우선봉일기」, 「조석헌역사록」 등을 통해 확인되며, 현재의 위치는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현장에는 2010년 예산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관작리전적지기념탑 /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관작리 전적지 내포 동학농민군 추모비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관작리 산 3-1
내포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그믐 밤 자시(子時)에 삽교읍 하포리에서 덕의포 총기포령을 내린 후 삽교읍 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반일항전을 위해 덕산·해미·온양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10월 11일 관군이 예포대도소를 기습 공격하여 동학농민군이 큰 피해를 입고 서산·태안지역으로 물러났다. 이후 태안·서산지역에 머무르던 동학농민군 2만여 명은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고, 여세를 몰아 면천과 고덕 상장리·구만리를 돌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10월 25일 역리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한양으로 올라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신례원 관작리에 6만여 명이 모였다. 이를 파악한 호연초토사 겸 홍주목사 이승우가 동학농민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10월 26일 관군·유희군·향병 등을 모아 농민군을 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한 이 전투에서 관군대장 김덕경, 장수 7~8인과 많은 유회군·향병이 전사하였다.
춘암상사박인호유허비(春菴上師朴寅浩遺墟碑)

춘암상사박인호유허비
• (유허비)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양막리 51-1
1985년 천도교중앙총부의 지원을 받아 춘암(春庵) 박인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안내 표석은 1997년에 설치되었다.
박인호(朴寅浩 1855~1940)
- 덕의대접주,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 총지휘자
박인호(1855~1940)는 철종 6년 충청도 덕산군 장촌면 막동(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용호(龍浩), 자는 도일(道一)이다. 1883년 동학에 입도했고, 1899년 3월 10일 의암 손병희로부터 춘암(春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3년 2월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의 신원을 위해 전개된 광화문 복합상소 때 손병희, 강시원, 손천민, 김연국 등과 함께 참가하였고,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보은집회 때도 많은 교도를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시기 3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예산·홍주 등지에서 활약한 박인호는 1894년 11월 해월의 명에 따라 호서지방의 동학농민군 5만여 명을 지휘하여 면천(沔川) 승전곡전투 때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덕산 구만포전투와 신례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홍주성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부대를 해산하고 금오산으로 숨어들어 토굴생활을 하였다.
이후 1908년 박인호는 천도교의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제4대 대도주가 되었고,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와 함께 거사를 도모하였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사람으로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인호 생가 터

박인호 생가 터
• (생가 터)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114-2
생가는 유허비와 약 100m 정도 떨어져 곳에 생가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 생가 터에는 축사가 자리잡고 있다.
호연초토사이공승우영세불망비(湖沿招討使李公勝宇永世不忘碑)


대흥중학교 앞의 비석들 이승우영세불망비 (왼쪽부터 세 번째)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242-3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주목사이자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진압의 책임자였던 이승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1895년 10월에 세워진 이 비는 원래 예산군 덕치 2리에 있었으나 1980년대 도로확장공사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승우가 얼마나 잔인하게 동학농민군을 진압·학살했는가는 후임 대흥군수였던 이창세(李昌世)의 군수이후창세애민청덕비(郡守李侯昌世愛民淸德碑) 중 “때 마침 큰 난리를 만나 난적들을 참초하였다(遭時大擾 亂賊斬剿)”구절과 권병덕이 남긴 회고(回顧) “홍주목사 이승우와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삼남에 동학군토벌을 대행하야 모조리 진멸하였다. 교도를 잡아다가 목을 베거나 땅에 묻어 죽이기도 하고 불에 태워죽이기도 하고 총으로 쏘아죽이기도 하고 사지를 찢어죽이기도 하는 그 참혹한 형상과 그 부모처자형제를 연좌로 잡아다가 죽이니 이는 만고에 없는 대 학정이었다.”를 통해 확인된다.
참고자료
- 이진영, 「충청도 내포지역의 동학농민전쟁 전개양상과 특성」, 2003.
- 표영삼, 『東學 2 –해월의 고난과 역정』, 통나무, 2005.
- 박성묵, 『예산동학혁명사』, 화담, 2007.
- 「巡撫先鋒陣謄錄」,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21』,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 「洪陽紀事」,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 「兩湖右先鋒日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