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북부지역의 최고 동학농민군 지도자 성두한
김양식 (충북발전연구원 충북학연구소장)
성두한이란 인물의 활동상을 재조명하여 그가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기며 동학의 얼을 이 땅 위에 다시 꽃피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이런저런 이유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이 많은데, 성두한(成斗漢, 1845~1895)이 대표적이다. 그는 1895년 3월에 전봉준·손화중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을 정도이니,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성두한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월악산 주변을 중심으로 한 충북 북부지역이었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도 농민봉기가 있었는데, 동학농민군이 본격 활동한 것은 갑오년 7월부터이다. 8월에 이르면, 충북 북부지역은 동학농민군이 거의 장악한 상태였다.
충북 북부지역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가 바로 성두한이었다. 그는 갑오년 당시 47세로 월악산 송계리(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평민이었다. 그가 언제 동학에 입도하였는지 모르지만, 1893년에 청풍 대접주로서 동학 도소를 설치한 뒤 동학도를 통솔하고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94년 7월에는 단양⋅제천을 대표하는 동학 집강에 임명되었다. 일본군 역시 충북지역의 쟁쟁한 동학농민군 대장으로 충주의 성두한을 꼽았다.
7, 8월 동안 청풍 일대를 장악하고 일본군과 대치하던 성두한은 9월초에 강원도로 진출하였다. 9월 1, 2일경 제천⋅청풍 등지의 농민군과 영월⋅평창 농민군 수천 명이 연합해 험준한 강릉 대화면 모로치를 넘었다. 강릉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강릉에 당도, 저항하는 관군을 무찌르고 강릉을 손쉽게 장악하였다. 이때가 9월 5일이었다.
성두한 부대가 강릉으로 이동한 사이 청풍일대는 위기를 직면하였다. 일본군과 보수양반층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영춘에서는 9월 3일부터 양반들이 현감·아전들과 합세해 동학농민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9월 17일 충주 가흥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수비병은 청풍부근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30명을 사살하고 소총 2천정과 화약을 빼앗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강릉 쪽에 있던 성두한에게 전해졌다. 성두한은 급히 부대를 인솔해 남대천을 따라 단양으로 질주하였다. 9월 20일 성두한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은 단양으로 쳐들어가 관아를 점령한 뒤, 다시 제천⋅영춘을 차례로 점령하고 충주 가흥을 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9월말 가흥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은 매우 위급한 상황에 놓이자 거듭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일본군 지원병이 충주 가흥에 도착한 것은 9월 29일, 일본군은 10월 1일 청풍지역 농민군과 접전하였다. 이 싸움에서 화력이 부족한 동학농민군이 패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쓰러졌다. 성두한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쪽으로 물러난 성두한 부대는 영월⋅평창 농민군과 다시 연합, 10월 15일 정선을 점령하였다. 강원도 전역은 사실상 농민군 수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일본 본국에서 파견된 일본군 1중대는 10월 25일 충주에서 원주를 거쳐 강원도 내륙으로 쳐들어왔다. 드디어 11월 5일, 정선 등지를 점거하고 있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은 평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농민군이 패하고 말았다. 이들 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성두한이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성두한은 어디선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1895년 3월에 재판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청풍⋅단양⋅제천⋅영춘에서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사형되었다. 이때 함께 사형된 농민군 대장은 전봉준⋅손화중⋅김덕명으로, 당시 성두한의 활동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성두한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장남인 성목현은 해방 이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충주 살미면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둘째 아들 성면현은 빨치산 중대장으로 월북했다고 한다. 지금도 성두한의 증손자 성태일이 청풍 송계리에 살고 있다.
성두한의 자손들이 빨치산을 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빨치산은 누구인가? 소설가 조정래가 쓴 ‘태백산맥’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빨치산을 그저 ‘공산당’으로 매도하기에는 우리 가슴을 너무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성두한이 인간다운 세상과 자주적인 민족을 만들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선봉에 섰듯이, 그 얼이 자손들에게도 전해진 것으로 추측한다. 성두한이란 인물의 활동상을 재조명하여 그가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기며 동학의 얼을 이 땅 위에 다시 꽃피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성두한의 주요 활동지였던 청풍 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