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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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12호
‘기억과 복원’의 역사적 과제와 기념사업

  ‘기억과 복원’의 역사적 과제와 기념사업

   2014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목표와 방향


원도연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문화콘텐츠 전공)



  1992년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을 2년 앞두고 처음 기념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의 기본목표는 ‘기억과 복원’이었다. 잊혀지고, 왜곡된 기억을 바로 세우고, 무너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복원하는 일이 기념사업의 첫 번째 목표였다. 교과서를 바로잡고 여전히 동학란으로 남겨져 있는 국가기록을 바로잡는 것,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잊혀졌거나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 대충 기억되어 있는 그 사건의 진실과 역사적 맥락을 밝히는 것, 혁명의 시대에 젊음과 인생과 목숨을 바친 한 많은 넋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제사상 한번 제대로 바쳐 올리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였다.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유적지 답사였다. 곳곳의 역사현장을 다니고, 기억을 더듬어 사람과 기록을 찾아내고 그곳에 의미 있는 표식을 남겨 다시 잊혀지지 않게 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동학농민혁명은 명예를 되찾았고 복권되었으며, 국가가 기념해야 하는 국가적 사업이 되었다.


  20년을 지나 당시 버려지고 무너졌던 유적과 전적지들은 정부와 각 시군의 노력으로 기념비와 공원이 만들어졌다. 기념사업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치러졌느냐의 문제를 떠나, 동학농민혁명이 지역사회의 빛나는 역사로 자리 잡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이 내년 120주년 두 갑자를 맞이하면서 끝끝내 마음에 흔쾌하지 않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원평의 구미란 전적지다. 원평은 이미 지역사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지역이다. 훌륭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3.1 독립운동에서도 큰 흔적을 남긴 자랑스러운 곳이다. 바로 그곳 원평 구미란 동산에는 지금도 수십인지 수백인지 모를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사들이 1894년 겨울의 그 모습 그대로 잠들어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원평은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전후로 원평은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1893년 금구취회는 농민혁명의 예고편이었다. 충청지역에 자리를 잡은 동학교단이 놀라고 당황할 정도의 혁명적 열기에 휩싸였던 곳이고,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뒤 영광까지 남하했다가 순식간에 전주성으로 올라오면서 임금이 보낸 특사를 처형하고 혁명군 스스로 퇴로를 끊었던 곳이기도 하다. 전봉준 장군의 실질적인 기반이 되었던 곳이고, 이곳 용계리에 터를 잡고 있던 김덕명 장군은 본인의 헌신은 물론이거니와 전봉준 장군의 절대적인 후견인이었다.


  이곳 원평의 구미란에서 동학농민군은 최후의 전투를 치렀다. 우금치에서 조일 연합군에게 밀려나 기약 없이 남하하던 전봉준 장군 등이 최후의 전력을 모아 항전을 했으나 하루 만에 공식기록으로 37명의 전사기록을 남기고 전투는 끝났다. 당연히 여기서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농민군이 이 뿐일까. 나는 그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지금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고 기념하겠다는 우리들 모두 당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미란에서 일본군의 총과 칼에 목숨을 잃어가는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다는 뿌듯함도 없이 반란군이 되어, 자신의 죽음으로 혁명이 성공하고 후세가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이 그 추운 겨울 눈 덮힌 산에서 쓸쓸이 죽어간 그들의 삶과 죽음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그곳 구미란은 1994년 백주년 때도, 2013년 두 갑자를 눈앞에 둔 지금도 그대로 버려진 땅이다. 유골도 수습되지 않았고 성의 없는 돌비석 하나도 세워지지 않았으며 간혹 답사객들의 쓸쓸한 발길만 지나가는 곳이다.


  또 하나는 북해도 대학에서 9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된 진도 출신 농민군 지도자 유골이다. 북해도 대학에서 유골이 발견되고 그 유골이 한국으로 봉환되던 그날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런데 봉환된 지 17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유골은 안장되지 못 한채 자리를 못 잡고 있다. 북해도 대학 창고에 있을 때나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지금이나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구미란과 북해도에서 봉환해온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그대로 둔 채 동학농민혁명 두 갑자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일은 절대로 이벤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이벤트로서가 아니라 역사로 만나야 하고, 역사는 그 시대의 소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2년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자고 처음 모였을 때의 목표였던 ‘기억과 복원’은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그대로 목표로 남아있다.


  동학농민혁명 두 갑자의 기념사업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기념사업간의 연대와 협력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좋으나, 기념사업의 주체는 지역운동가들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철저하게 지역의 분노와 힘이 분출한 사건이었다. 이 점은 동학농민혁명이 한국 민중운동사에 남긴 분명한 메시지이자 특징이다.


  또 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의미를 짚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중국과 인도, 베트남 등 한국과 유사한 조건에 놓여 있던 많은 나라들이 근대기에 거쳐야 했던 농민혁명을 세계사적 의미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서구중심의 근대혁명이 아닌 농민혁명으로부터 출발한 아시아적 모델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서구적 가치와 아시아의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다 치밀하게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을 새로운 의미에서 바라보는 일이 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두 갑자는 더 큰 이벤트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필자약력

 전북대 사회학과 졸 | 고려대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 박사 |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간사 | 문화저널 편집장 | 전주시정발전연구소 연구원 | 전북발전연구원 지역발전정책연구소장| 전북발전연구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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