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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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겨울 10호
118년 전 그날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던 짧은 여정을 돌아보며

  118년 전 그날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던 짧은 여정을 돌아보며


동학농민혁명 포럼회원

장경상



  10월 들어 처음 맞는 토요일.

  여느 때처럼 평범한 토요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또 설레는 토요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 불의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동학농민혁명군의 함성을 떠올리며, 그때의 발자취가 살아 숨 쉬는 전라북도 정읍으로 떠나는 답사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하루라는 짧은 여정이긴 했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샘솟는 설렘을 안고 전날 밤을 보냈다.


  양재역에서 오전 7시경 출발한 버스는 우리 일행들을 태운채로, 새로이 주말 아침이 시작되는 안개 자욱한 서울 도심을 뒤로하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정읍으로 향했다. 계절이 가을임을 확실하게 일깨워주기라도 하는 듯 들판은 황금색으로 노랗게 변해 있었다. 하늘은 자욱한 안개가 끼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배워가라며 미리 암시해 주는 듯, 좋은 날시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정읍은 삼국시대 이래로 여러 가지 유명한 일들이 많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 근대사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던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일대 대변혁이 일어났던 지역으로 더 유명하다. 이렇게 대변혁의 큰 물결이 일었던 역사의 현장으로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는 동안 내내 억누르지 못하는 벅찬 마음과 기나긴 사색 속에 시간을 할애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나오느라 밀린 잠을 보충했지만 나는 그 보다는 설레고 벅찬 마음을 한 가득 품으며 시간을 보냈고, 버스는 힘차게 바퀴를 굴리며 정읍행을 재촉했다.


  약 세 시간여에 걸친 운행 끝에 버스는 목적지인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나이가 지긋하신 정감이 넘쳐 보이는 해설사 선생님이 반겨주셨다. 그분의 인솔로 기념관 현관에 도착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현관 로비에 있던 말목장터 감나무가 말없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몇 해 전 태풍 매미로 나무에 손상이 갔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고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일행 모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118년 전 매우 튼실한 상태에서 이 감나무는 말목장터의 버팀목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때 전봉준 장군이 이 감나무 바로 앞에 집결한 동학농민군들에게 어려운 나라의 사정을 통탄하며 비분강개하던 모습이 절로 떠올려지건만, 그 역사를 증언해 주던 감나무가 전시관 한편에서 우리를 맞아할 줄을 어찌 알았으랴. 그러니 절로 숙연해 질 수밖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9세기 말엽은 조선이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했던 시기였다. 나라 안으로는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의 결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탐관오리가 전횡을 일삼은 데다 자연재해까지 겹쳐 식량생산량 마저 줄어들게 되어 농민들은 이런 어려움 속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나라 밖으로는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구열강들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각축장이 벌어지고 있던 그 때, 이웃 일본과 청나라 모두 조선을 집어 삼키기 위한 검은 속내를 드러냈고, 이런 배경 속에 동학농민혁명군은 위정자들의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나라를 바로 잡고 제국주의로 무장한 외세를 배격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이러나게 되었다. 기념관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부터 시작해서 당시 농민들의 생활상,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의의에 대하여 2개 전시실에 걸쳐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기념관이 언론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던 것보다 다소 협소했다는 점이다. 지난 2004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혁명으로 인정한 만큼 그 위상에 걸맞게 기념관도 확대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가치를 제대로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약 1시간 30분에 걸쳐 설명과 함께 기념관을 둘러보고 정읍역 인근 식당으로 이동하여 푸짐하게 차려진 꿀맛 같은 점심을 들었다. 진수성찬에 산해진미가 따로 없었다. 맛있는 점심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들을 답사했는데, 혁명을 논의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주산마을, 혁명군들의 항전지이자 일찍이 고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백산성,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자행된 대표적인 유적지 만석보터, 말목장터와 전봉준 장군 고택 및 단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토현 전적지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혁명군들의 발자취가 담긴 흔적들을 일일이 둘러보며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교훈을 되새겨 보았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이 민초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축조했다는 만석보터에서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라는 공자의 말이 저절로 떠올려졌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나 배경도 따지고 보면 관료들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폭정과 부정부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말을 외면한 채 단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민초들을 괴롭히는 위정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만석보터는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답사를 하며 큰 감동을 받은 곳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 곳도 있었다. 황토현 전적지가 그 전자요, 전봉준 장군 단소가 그 후자인데, 황토현 전적지를 접하며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관군에 맞서 죽창과 낫이라는 보잘 것 없는 무기를 가지고도 지략을 발휘하여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혁명군,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혁명군들의 굳세고 강한 정신력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장군에 단소에 이르러서는 아쉽게 실패로 돌아간 혁명의 지도자들이 처형되고 그 시신마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묘소마저 갖추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접하며 구천으로 육신 없이 떠돌고 있을 영령들이 얼마나 한스러울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짧아 세세하게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해서 그때 그 기억들을 다시금 새겨보고 싶다. 짧은 여정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그 때 그 날의 발자취를 따라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본 유익한 하루였다고 감히 자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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