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차기석(車箕錫)
성균관대 교수
배항섭
강원도에 동학이 처음으로 전파된 것은 최제우(崔濟愚)와 함께 체포되었던 이경화(李慶化)가1864년 3월 무렵 정배지인 영월(寧越) 소밀원을 중심으로 포교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868년 3월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양양(襄陽)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어 1871년 이필제(李弼濟)난을 계기로 경상도 지역의 조직이 와해되자 최시형은 주로 영월·정선(旌善)·인제(隣提)등 강원도 산간지역을 돌며 포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1880년 5월에는 인제 갑둔리에 각판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東經大全)” 100권을 간행하였으며, 1881년에는 인제 천동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의 결과1893년 3월 보은(報恩)집회에는 관동대접주 이원팔(李元八)의 지휘 하에 원주(原州)접의 200여 명 등 다수의 교도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홍천의 접주 차기석도 홍천 지역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보은집회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강원도 홍천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 지도자 차기석
강원도는 북접(北接)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제1차 기포 당시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으며, 농민군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1894년 여름부터였다. 간원지역 농민군 활동은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충청·경사동 지역과도 일정한 연계가 있었던 평창·정선·영월·강릉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홍천·원주·횡성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이때 홍천 일대에서 농민군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가 차기석이었다. 9월말 최시형의 기포령이 전달되자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개 읍의 접주로 불렸던 차기석은 1,000여 명의 농민군을 결집하여 홍천 내면에서 일어났다. 당시 차기석은 호남, 호서의 농민군과 달리 자신들은 “다만 학업으로 일을 삼으니, 의롭지 아니한 거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농민군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차기석은 최시형의 동원령에 따라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보은 일대에 있던 북접의 주력부대에 합류하려 했으나, 경기도 지평에서 일어난 맹영재의 민보군에 길이 막혀 다시 홍천으로 돌아갔다.
장야평에서 맹영재와 대결하다
홍천으로 돌아간 차기석의 농민군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0월 13일 밤이었다. 이들은 내촌면 물걸리에 있는 동창을 공격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호응을 거부하는 자들은 죽이거나 위협하거나 집을 불태웠으며,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어 이들은 강릉부 좌운으로 이동하여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이 소식을 접한 지평의 민보군 맹영재는 민보군을 이끌고 홍천 쪽으로 진출하여 이들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차기석이 이끄는 농민군은 맹영재의 민보군을 맞아 홍천 장야평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0월 21일이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사인순(史仁淳) 등 3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솔치재를 넘어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후퇴하여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 일대의 구릉 위에 진을 친 농민군 수천 명은 백색 깃발을 곳곳에 세우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서석 풍암리 전투와 자작고개 이야기
10월 22일 서석면 풍암리까지 추격해온 맹영재의 민보군과 동학농민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다. 동학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저들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붇돋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을 한 맹영재 군과 벌인 접전에서 엄청난 동학농민군이 희생하였다. “천도교회사초교(天道敎會史草稿)”에서 이 전투로 홍천군 서석면 일대는 “인종(人種)이 영절(永絶)하얏더라”라고 할 정도였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날 희생당한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동학농민군과 인근에서 참여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800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자작고개 너머 풍암 2리 일대 마을에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같은 날 제사를 모시는 집이 수십 여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모두 자작고개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들을 모시는 제사였다. 전투 중 사상당한 농민군의 피가 질펀하여 그곳을 걸어가면 “자작자작”소리가 났다하여 자작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 동학혁명군위령탑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차기석의 최후와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이후 차기석은 내면 쪽을 후퇴하여 자운·흥정·원당리 약수포 등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양양 간성(干城) 등지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1월 10일경부터 관군과 민보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차기석은 11월 12일에는 원당리(元堂里)에서 박동의가 이끄는 강릉 민보군과 양양 민보군의 합동공세를 받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차기석은 강릉 소모영으로 압송되었으며, 11월 22일 사대(射臺)앞에서 교장(敎場, 오늘 날 강릉여중)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참형된 차기석과 박학조의 수급은 원주 감영으로 보내졌다. 11월 25일에는 여량의 접주 지왈길(池曰吉)까지 체포되어 참수됨으로서 강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은 평정되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