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한 몸을 바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 강신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중 가족이나 형제가 함께 참여한 사례가 상당히 많다. 특히 이번에 방문한 강신춘 선생님의 조부님들은 네 분이 참여하셨고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게다가 그 중 강재형 조부님께서는 동학농민군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사용할 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가산을 모두 탕진하셨다고 한다. 구국의 일념으로 모든 것을 바친 강재형, 강부형, 강태형 조부님의 후손 강신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정한 나라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는 시간이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어느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답) 그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기 위해 먼저 가족관계를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의 집안은 16대 조상 때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의 집안은 16대 조상 때부터 쭉 논산시 은진군 채운면 제내리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희 증조부님께서는 3남을 두셨는데, 각자 성함이 강재형, 강부형, 강태형 조부님이십니다. 이 중 강재형 조부님께서는 이 곳 제내리에서 동학 접주직을 맡으셨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 때부터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여 애국심을 가지고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삼례에서 2차 봉기하여 농민군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을 때, 조부님께서도 휘하에 2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나서셨습니다. 그리고 완주군 화산면에서 즉 논산과 익산지역의 대장역할을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큰 뜻을 품은 세분의 조부님들과 큰집 조부님께서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우금티전투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알고 계시듯이 전황은 급격하게 기울어졌고, 결국 11월에 논산 황화대전투에서 조부님들과 큰집 조부님 모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언제 떠올려 보아도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문) 조부님께서 농민군들의 무기를 제조하시고 훈련시키셨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대장간을 운영하셨습니까?
답) 조부님께서 직접 대장간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근에 있는 대장간 10여 곳을 모두 동원하여 무기, 화살 등을 제조해 동학농민군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토다리라는 곳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힘쓰시다 보니 재산을 모두 탕진하셨다고 합니다.
문) 조부님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활동하신 사항에 대해 주로 어떤 분이 말씀해 주셨나요?
답)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되었을 때 시제를 따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님과 사촌형님이 조부님들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조부님들이 다 돌아가셔서 참 안타깝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모여서 논산으로 진군해갔다는 것과 동학농민군을 먹이기 위해서 소를 수없이 잡았다는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문) 어떤 계기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가지시고 증조부님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결심하게 되셨습니까?
답) 제가 타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큰형님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서류를 가득 들고 찾아오셔서 조부님들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협력해서 조부님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우자는 말씀을 하시면서 비문을 하나 보여주셨는데 사형제가 우금티 전투에 우국총정의 마음으로 참여하셔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비문은 후에 알고 보니 현재는 작고하신 故최현식 선생님들께서 작성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형님께서 조부님들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려 동분서주 하셨으나 이미 오래된 일이라 자료를 찾을 길이 없어 최현식 선생님을 수십 번 찾아가서 말씀을 여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부탁드려 추모비의 문구를 받아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왠지 모를 반감이 들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끝끝내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세월이 상당히 흐른 어느 날 신문광고에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 등록하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묘한 느낌이 생겨 두 번째로 시제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사촌형님을 만나 그때는 돌아가신 큰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그분이 최현식 선생님의 비문 등 큰형님께서 모아두신 서류를 모두 전해 받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제가 전후사정을 이야기 한 후 그것들을 가져다 제출하여 유족으로 동록되었습니다. 그 등록과정에서 최현식 선생님이 우연히 비문을 발견하시고 저에게 연락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약 10여년 만에 자신이 쓴 비문을 보셨으니 신기하기도 하셨겠지요. 그분께서는 저에게 꼭 추모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언젠가는 꼭 추모비를 세워 조부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문) 조부님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답) 앞서 말씀드렸듯이 강재형 조부께서는 익산과 논산지역의 접주셨습니다. 전봉준장군과 대등하게 작전 회의를 가질 정도였으니까요. 이분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완주군 화산면에서 치렀습니다. 장례식 당시 장지까지 30여리의 길을 상여를 메고 갔는데 마을주민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끝가지 따라왔다고 합니다. 일본관원들이 이를 목격하였으나 장례까지 방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묵인하였다고 합니다. 안타가운 것은 산소의 행방을 몰라 오랫동안 방치되는 바람에, 후에 위치를 찾았을 때는 이미 산지기가 부재자 신청을 해두어서 모실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강태형 조부께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상 당하셔서 숨어 지내시다가 6년 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문)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의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답) 네. 일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방문한다면 그저 박물관에 온 느낌 그 이상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념관을 방문하였을 때 마치 장례식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처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조상님들께서 선대에 그렇게 안타깝게 사셨구나 하는 생각에 자꾸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문) 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딱히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만, 하나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익산과 논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조사가 조금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동학농민혁명도 깊이 연구되어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을 위한 기념비로 세워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