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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겨울 10호
광화문 복합상소와 괘서사건

  광화문 복합상소와 괘서사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

이병규



  동학교단, 광화문에서 국왕에게 상소를 하다


  광화문은 조선의 정궁인 경북궁의 정문이다. 이곳에서 동학교도들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것도 한 두명이 아니라 40여명이 3일간 지속하였다. 무슨 이유에서 동학교도들은 광화문에서 상소를 올린 것일까? 동학교단이 주도한 공주집회와 삼례집회의 교조신원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교조의 신원, 즉 동학공인은 공주의 충청감사와 전주의 전라감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동학교단은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국왕이 있는 서울로 향하였다. 그것이 바로 광화문 복합상소이다.


  동학교단은 삼례집회가 끝난 뒤에, 복합상소를 계획하고 있다고 각지에 알렸다. 이어서 1892년 12월 6일에는 복합상소에 대비한 도소(都所)를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2월 중순 서울로 직접 올라가지 않고 정보에 소장을 올려, 동학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하다고 하면서 정부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소에 정부의 대답이 없자, 동학교단은 서울로 올라가 상소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1893년 청주 송산리에 있던 손천민이 집에 봉소도소(奉疎都所:소장을 올리기 위한 본부)를 설치했다. 봉소도소는 정부에 신원운동을 추진키로 했음을 각지에 통문으로 알린 다음, 서병학을 2월 초순 서울로 보내 도소를 정하도록 했다. 다른 동학의 지도자들은 2월 8일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선비처럼 차려입고 일제히 서울로 향하였다.


  복합상소는 2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박광호(朴光浩)를 대표로 한 복합상소 참여자 40여명은 3일동안 상소문을 받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호소하였다. 동학의 공인을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상소절차가 잘못되었다는 핑계로 상소접수를 거부하였다. 다만 14일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원하는 바를 따라 해주겠다.’는 내용의 구전(口傳)을 내렸다. 정6품 관원인 사알(司謁:조선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관리)이 전한 이 같은 대답은 해산명령과도 같은 통고였다.


  결국 동학교단은 궁궐 앞 복합상소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이후 오히려 “이단을 내세워 야료(惹鬧:까닭 없이 트집을 잡고 함부로 떠들어 댐)를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으며 나라 법에 따라 죽임을 내릴 것이다.”는 전교와 함께 상소 주동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뒤따랐을 뿐이었다. 말하자면1892년 10월부터 벌여 온 신원운동은 복합상소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동학교단의 현실인식과 문제해결방법의 한계를 드러낸 대목이기도 하다. 



  변혁지향세력이 주도한 괘서사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게시하는 것을 괘서(掛書)라고 한다. 벽서라고도 불리는  괘서는 오늘 날 대자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며, 개인 간의 사적인 고발에서부터 국정을 비판하고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것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서울 장안에서는 배외(排外)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의 외국 공관과 교회당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괘서가 나붙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의 학당에 붙은 괘서를 시작으로 한 달여 동안 서울에서 잇따라 발생한 외국인 위협 괘서사건은 당시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광화문 복합상소 이전부터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외국인을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던 상황이어서, 괘서는 외국인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서울에서 발생한 외국인 위협 괘서는 4건이 확인되고 있다. 미국인 서교사 집에2건의 괘서가 붙었고, 프랑스·일본 공사관에 각 1건의 괘서가 붙었다.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이들 괘서는 내용상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  확장에 강한 증오심을 표출하고 있다. 첫 괘서는 광화문 복합상소가 해산한 다음날인 1893년 2월 14일 밤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가 세운 학당의 문에 붙은 다음과 같은 괘서였다. “천당과 지옥은 이 또한 무슨 소리인가. 그들은 천당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누가 보았단 말인가. 우리도의 근원은 하늘에 나서 밝은 하늘의 뜻을 천하에 비치니 감히 날뛰면서도 도를 능멸할 수 있는가. 세상을 일치할 도는 이치 중에 있으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으랴. 소인배들은 대도를 함께하며 사람마다 그 서책을 불태우면 혹시 만의 하나라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백운산인(白雲山人) 궁을서생(弓乙書生)’이라 하였을 뿐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붙은 이 괘서는 기독교를 믿는 조선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기독교를 배척하는 괘서는 이어 2월 18일 미국인 존손의 집 교회당에도 붙었다. “교두(敎頭:신부·목사) 등을 효유하노라. 그렇지 않으면 충신·인의한 우리는 갑옷, 투구, 방패를 갖추어 오는 3월 7일에 너희들을 모두 쫓아낼 것이다.”라는 괘서였다. 다음은 3월 2일 일본공사관 벽에 붙은 괘서이다. “일본 상려관은 펴 보아라…… 아직도 탐욕스런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응거하여 공격하는 것은 으뜸으로 삼고 살육을 본업으로 삼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필경 어쩌자는 것인가…… 하늘은 너희들을 증오하며 우리 스승님은 이미 (너희들을) 경계하였으니 안위의 기틀은 너희가 취함에 달려 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괘서사건을 이끈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괘서 자체가 모두 익명으로 된데다 당시 배외감정이 어느 한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조선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도 세력을 지목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는 하지만 복합상소가 전개될 때, 삼례에 모여 있던 이들이 전라감사에게 ‘동학을 사도로 칭하지 말고 외국선교사와 상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을 것이며 탐학한 지방 관리를 제거하라’고 요구한데 이어, 그 일부가 상격했던 적이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괘서사건은 동학교단의 온건하고 합법적인 상소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들, 즉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교단의 변혁을 지향했던 혁신적 지도자들이 주도했음이 확실하다.



  참고문헌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김은정·문경민·김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출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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