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유적을 이어받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 이사장 김동길

이평에서는 배나무를 많이 재배하지 않는다. 혹자들은 ‘이평(梨坪)이니 배가 특산물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평이라는 이름은 배나무 들판이 아니라 배들평야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배들평야란 배가 들어오는 평야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국토전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지명을 잘못 기록한 예가 많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의 김동길 이사장님은 이러한 이평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김동길 이사장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어보도록 하자.
문)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답) 이평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동학농민혁명 선양조직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 이곳에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는 이 고장 사람들의 숭고한 얼인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확실하게 알리고 영구 보존하며 또한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의 설립과정을 알려 주십시오.
답) 제가 이평 면장으로 재직했을 당시 이평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1996년에 탐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탐구회의 운영이 유명무실해져 회원들과 논의하여 해체하게 되고, 그를 기반으로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정관이 승인나면서부터 공식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설립 당시에는 이평 출신 회원이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외부지역에서도 회원가입을 신청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문) 유적보존회 회원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 비단 회원들만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이평의 주민들은 모두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선양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숭고한 뜻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그 뜻을 이어받아 후손들을 교육시키고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는 활발한 동학농민혁명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문) 갑오농민동학혁명유적보존회를 설립하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어떠하였습니까?
답) 이평의 동학농민혁명정신을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것을 모두 후회하고 이를 기념할 단체가 없는 것을 모두가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만들게 되었습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노소간에 이구동성으로 잘 설립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입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참여하려는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회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래도 자율적으로 구성된 회원들이라서 그런지 아주 열성적인 분들이 많았습니다.
문) 김동길 이사장님과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이연이 있습니까?
답) 제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인연은 없습니다. 단지 제가 이곳에서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주민들을 만나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하나 기억하다 보니 차츰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이해를 하게 디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산 지식으로, 그리고 경험으로 체득하게 된 것이지요. 그 후 면장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다 보니 인연이 된 것이지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 정읍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말목장터 감나무입니다. 이 감나무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고부봉기 당시 이 감나무 아래에서 연설을 하셨던 곳이며, 연설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가지를 드리워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신통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평을 방문한 사람들이 감나무를 많이 보고 간다는 이유로 감나무 옆에 정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짓기 위해 땅속 깊이 시멘트를 부어넣는 바람에 그 영향을 받아 감나무가 고사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정자를 아래로 옮겼으나 나무가 고사하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나무가 태풍 매미가 왔을 당시 벼락을 맞아 쓰러져 지금처럼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처리 되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정자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었던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상징물인 감나무 옆에 짓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지요. 당시 농민들이 논, 밭을 매고 난 뒤 잠시 쉬어가던 곳을 모정(茅亭)이라 하는데 이것을 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되면 감나무도 죽지 않고 또한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감나무를 건강하게 한다는 취지로 뿌리를 북돋아 주었는데, 사실 감나무는 뿌리를 북돋아주면 안된다고 합니다. 무지해서 벌인 일이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과 동시에 지식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문) 정읍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사건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고부봉기입니다. 정읍에서 항상 황토현 전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황토현 전투는 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싸운 첫 전투였으며 대승을 거둔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배들평야의 농민들이 가장 처음으로 일으킨 혁명인 고부봉기도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 본질이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선양해 가야 할 것입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답) 일단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지역명칭의 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평면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배들’이라는 명칭을 일본인들이 잘못 해석하여 이평(梨坪)이라 기록한 것으로 사실은 배가 들어오는 평야라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이를 제가 고쳐보려 하였으나 한 번 정해진 행정구역의 명칭은 바꾸기가 힘들다고 하여 고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후에 기회가 되면 배들면, 또는 만석면으로 명칭을 교체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문) 기념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십니까?
답) 지금처럼 사무처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옳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