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기념물과 기억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이경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념물은 시대의 산물 혹은 기억의 새로운 장치로서 그 역사적장소에 세워졌다. 기념물은 모뉴먼트와 메모리얼로 해석되는데, 모뉴먼트는 개인이나 역사적 사건 또는 추상적 개념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는 의미에 가깝고, 메모리얼은 애도의 의미가 강하다. 오늘날의 프랑스 잔 다르크는 가톨릭 세력과 공화국정부의 화해의 제스처라는 상징적 의미로서 오를레앙을 축제의 도시로 만들었다. 오귀스트 르네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 <발자크>는 인물을 기리면서 역사적 성찰을 유도하였다. 워싱턴 DC의 월남전 참전용사 기념물(VVM)은 검은 화강석 벽에 새겨진 참전용사자의 이름을 읽는 동안 그곳에 비친 멍하게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여 모뉴먼트와 메모리얼을 연결하고 그 자체가 베트남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기념물은 시대의 이념을 반영한다는 전제 하에 동학농민혁명의 기념물을 통하여 우리의 기억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동학(東學)은 서학(西學)에 대응하여 민족주의와 평등사상을 지향한 종교로, 제국주의의 침탈과 봉건체제의 모순에 맞서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걸고 민중의 호응을 크게 얻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이후, 동학농민군은 일본과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거국적인 2차 봉기를 일으켰다. 1894년 11월 최대 규모의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전봉준(1855~1895)이 이끈 2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근대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에게 의해 학살에 가까운 패전을 당하였다. 이듬해 초 일본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교수형에 처하고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은 어떻게 회상되고 있을까?
박정희는 4·19혁명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의 대리인 노릇을 하였으며 군정의 힘으로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총선거일인 1963년 10월 3일에 맞춰 정읍 황토현 언덕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제막되었다. 박정희 집권 이후 ‘동학(당) 난’, ‘동학 난리’라는 기존의 명명이 동학혁명으로 개명되었다. 이 기념탑은 화강암 재료의 팔각 주탑(柱塔)을 주요 모티프로 하고 있어 이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어 1973년에는 공주 우금티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이 팔각 주탑 형식으로 세워졌다. 그 기념문에는 ‘5·16혁명이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10월 유신은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선양하리라’는 내용이 새겨졌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을 5·16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를 낳은 군부독재를 합리화하는 데에 이용한 혐의가 짙다. 대체적으로 정치성 모뉴먼트는 단순, 획일, 상승의 조형물을 통해 과장이나 강요를 조형언어로 삼는 경향이 있는 가운데 위의 조형물은 우리 사회를 무의식화, 획일화하는 하나의 보조 장치가 되었다고 본다.
신군부의 기념물로서, 전두환 정권은 1983년 황토현 전적지에 ‘전봉준 장군 유적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1987년에 기념관을 완공하였다. 지루하여 보이는 그 기념관에는 초상화 및 일련의 역사화, 자료관 그리고 전봉준 장군 동상과 혁명의 과정을 부조한 기념물이 있다. 조형물은 대표적인 친일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 제작하였으며 의연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는 소풍가는 모양새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1989년 노태우 정권도 부안 백산에 <동학혁명백산창의비>를 세웠다. 그것은 1963년에 세워진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따라하되 축소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러한 신군부의 기념물은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서 문화적 독창성의 결여와 경직, 혹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로 인한 정치권력과 문화계의 무의식화를 드러내고 있다.
문민정부 이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방자치제 주관의 기념물이 상당수 생겨났는데, 이것들은 정치권력의 유지수단으로서의 의도성이 상당부분 배제되고 동학 자체의 기억을 상징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먼저, 정읍 고부면 신중리에 있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묘지와 제사의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죽은 동지를 안고 죽창을 올린 농민군이 중앙에 자리하며 주변에는 무명의 농민군 얼굴이 부조된 묘비석들이 열 맞춰 놓여 있다. 101주년을 기념하여 우금티창작단이 공주 우금치에 조형물을 세웠다. 재현된 농민군의 깃발을 따라가면 금줄, 솟대, 장승으로 꾸며진 신성한 공간에 들어서게 되고 그곳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10m 높이의 인물상이 세워졌다. 장성군 황룡면의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은 황룡강전투의 승리를 기린 100주년기념물이다. 정읍 내장산 입구에는 높이 1,894cm의 <갑오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탑>이 1997년에 세워졌다. 이어 그곳 전봉준 공원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초상조각과 내러티브 아트가 부조로 둘러져 있다.
이제 21세기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우리의 역사적, 문화적 자산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2002년에 삼례봉기를 기념하여 세워진 조형물은 기존의 중앙주탑식(中央柱塔式)을 탈피하였다. 이 기념물은 진입로에 판화형식을 담은 석등, 돌무지에서 출현하여 농기구를 쥐고 있는 손, 그리고 원을 그리며 대동 세상을 꿈꾸는 농민군들의 모습, 그 농민군 조각과 관람객들을 동시에 비추는 흑경(黑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가 공모한 배승현의 작품이다. 이 모뉴먼트의 흑경은 역사와 자신에 대한 반추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반사’는 바로 워싱턴DC의 월남전 참전용사 기념물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2004년에 세워진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역사박물관의 기능을 더하여 세계 제국주의의 실태 속에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그리고 45회를 이어가는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옛 황토현동학축제 혹은 갑오동학혁명기념문화제)는 그 인식의 폭을 넓혀 역사체험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념물은 군부가 이용한 민족주의의 아이콘이었고 군사정권이 연장되면서 경직된 무의식화의 경향을 초래하였으나, 점차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양호한 기념물은 사회 주도 이념의 도덕성과 관련된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재해석은 새로운 기억을 마련할 것이다. 의미 있는 기념물은 기억을 관리하는 장치가 될 것이며 나아가 진정성을 머금고 피어난 기념물은 역사와 기억을 매개하는 본연의 기능을 충족시킬 것이다. 주지하듯이 역사는 애초에 그것을 만드는 민족보다 후대에 그것을 기술하는 민족이 더 위대하다는 교훈이 있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래의 비전이 잉태된다. 그리고 그 역사적, 문화적 자산에 대한 가치 있는 활용은 문화의 시대인 21세기의 의무이다.
필자약력
전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계약교수
현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전라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대표논저
『한국의 마애불』(공저), 다른세상, 2001.10
「기념물을 통한 동학농민혁명의 기억과 전승」
『인문콘텐츠』10호, 2007.12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