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다녀와서…
한국전통문화진흥원
임인위
오늘은 [한국전통문화진흥원]의 정기답사로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답사를 가는 날이다. 밤새 세찬 비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설쳤던 잠을 정리하고 문 밖으로 나가봤다. 비바람이 더 거세진 듯하다.
‘과연 오늘 답사를 일정대로,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회원님들은 모두 제시간에 나올까? 날씨가 나빠 답사를 포기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일기 예보에서 태풍 '카눈'이 아침 9시경에 수도권을 지나간다고 했으니,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니 날씨가 오히려 좋아질 거야’ 하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준다.
어제 밤에 꾸려놨던 작은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에 우산은 별 소용이 없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니, 버스 안내판은 점검중이라고 안내문이 붙어있고 내가 탈 버스가 다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시간 여유가 조금은 있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기다리면 위안삼아 같이 기다려 볼 텐데, 아무도 정류장으로 오지 않고, 지나가던 빈 택시가 와서 선다.
'그래, 기다리다 늦지 말고 빨리 택시를 타자' 고 생각하며 택시를 탔다. 제법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니, 기사님이 “이 궂은 날씨에 어딜 가냐”며 걱정스레 쳐다본다.
“예, 전북 지역으로 답사 여행을 다녀오기로 해서 날씨는 좋지 않지만 계획대로 출발하는 겁니다.”라고 답하니 “무슨 답사고 얼마나 좋은 곳을 가기에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가냐”고 한마디 보탠다.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둘러보러 가는 겁니다.” 라고 답하고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던 것을 이제는 그것이 동학란이 아니고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뀐 후에 그 유적지를 가보게 되어 기대가 크다’고 덧붙였다.
택시에서 내려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비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첫 전철이고 궂은 날씨니까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이 가득한 전철에 탔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딜 가고 있을까? 모두 회사로,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일까?’생각해 본다. 몇 역 지나니 앞좌석이 빈다. 그 자리에 앉아 앞에 앉은 사람과 서있는 사람들을 보니 저들의 복장과 얼굴 모습들이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른 새벽부터 비바람과는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위해 일자리로 나가는 우리의 소시민들의 모습이었다.
‘1894년 고부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힘들었기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봉기를 했을까?’ 생각하니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은 힘들기가 매일반이고 정치하는 자들은 제 배불리기에만 혈안이 되어있기는 마찬가지이니, 11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다른 것은 동학농민혁명 시절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무장봉기를 했지만, 지금은 선거라는 다른 형태의 봉기를 통해서 시장을, 국회의원을, 대통령을 바꿀 수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민주적인 형태로 바뀐 계기가 바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는 점이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동학농민혁명」에서 「3·1독립만세운동」으로, 그리고 「4·19학생민주화혁명」과 「5·18광주민주화혁명」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발전해서 지금에 이르렀다면, 오늘 내가 가는 답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떠나는 답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버스는 태풍을 거슬러 예정보다 조금 늦게 정읍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도착했다. 새벽부터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오늘 답사가 우리에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줄 것을 예고하듯이 점점이 햇살로 바뀌어간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사업부의 직원 두 분과 해설사 분들의 따뜻한 안내로 답사를 시작했다. 기념관에서는 마침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찾아가다]라는 주제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어 우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 진압군 대대장인 미나미 고시로의 수집문서 등이 특별전시 되어있는 기획전시실의 자료를 보며 왜 동학란이 아니고 동학농민혁명인지, 왜 농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에 대해 해설을 들었다. 새로이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게 된 시간이었다.
기념관을 둘러본 후 좋은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걸어서 「황토현전적지」로 갔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수천명의 정규군을 격퇴시킨 최초의 승전장소로 구 기념관,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구민사(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장군과 농민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전봉준장군 동상이 있는 곳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기념재단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맛깔스런 남도 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답사지인 「만석보유적지」로 향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인 「만석보유적지」에서 1892년(고종29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만행과 착취에 대해 설명을 듣고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과 배경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의 생가는 알 수 없으나,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전 5~6년간 거주하던 「전봉준선생 고택」을 둘러본 후 「고부면 주산마을」을 향했다. 주산마을에서 「사발통문작성지(이두형家)」와 사발통문 발견을 기념하여 세운 「동학농민혁명모의탑」과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을 보고 답사를 끝냈다.
당시의 농민군들이 바로 지금의 서민들이란 것을 말해주듯 위령탑 옆의 정자에는 마을어르신들이 한가로이 둘러앉아 수박을 먹다가 우리 답사팀에게 몇 쪽을 나눠준다. ‘동학농민군들이 바로 이들이고, 이들이 바로 내 자신이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앞에서 그 당시 농민들의 봉기가 「3·1독립만세운동」, 「4·19학생민주화혁명」과 「5·18광주민주화혁명」을 거쳐 지금의 민주주의로 이어져 왔다는 해설사분의 열성적인 설명을 들으며, 우리의 선조들인 1894년의 무명의 농민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며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투표권이 그 당시 농민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양 손에 들었던 총칼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리일까?
이번 답사를 통하여 「'동학'을 창시한 동학지도자들이 동학농민군을 이끌었지만 대다수 농민군들은 동학에 단순 가담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의 원동력이 단순히 동학(나중에 천도교로 발전함)이라는 종교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로서 당시의 민중 봉기는 '동학혁명'이 아닌 '동학농민혁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다.」라는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 땅에서 벌어진 역사의 본질과 진실을 바로 알고 지켜나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그로서 우리가 동학농민군에게서 물려받은 귀한 민주주의의 정신을 우리 후손에게 더욱 발전시켜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갖게 된 귀중한 시간이었다.
아울러 ‘더 많은 우리 이웃이 이곳을 다녀가서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널리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