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의 동학농민군 대접주 고순택
동국대학교 연구교수
조재곤
농민군 지도자로 각종 전투에 참여
고순택의 본관은 장흥으로 원 이름은 창주(昶柱)이고 순택(順宅[澤])은 자이다. 전라도 무장의 동학농민군 대접주로 활약하였다. 1858년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현재의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고제량(高濟良)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글도 배우고 무예도 익혔다 한다. 그러던 중 나이 37세 되던 1894년부터 동학농민군에 투입하여 이 지역의 대표적 농민군 지도자인 손화중포에서 송문수, 최경칠, 문덕중 등과 함께 그해 3월 고향에서 무장기포에 참여하였다.
이어 백산봉기, 황토현전투, 황룡촌전투, 전주점령 등에도 참여하는 한편 농민군들을 지도하고 뒷바라지 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전한다. 고순택은 무장에서는 세력이 큰 접주였던 것으로 보이며, 계속해서 9월의 2차 봉기에도 참가하였다. 당시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광철(光喆)도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민군 대열에 합류하여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각종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법무아문의 판결과 석방
그러나 고순택은 그해 12월 일본군과 관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시 체포되어 ‘전라도에서 새로운 왕국(王國)을 건설하여 오랜 동안 양민을 괴롭혔던 동학당의 거괴(巨魁)’로 규정된 후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홍낙관, 최경태, 박봉양, 김방서, 권풍식 등 지도급 인물과 함께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압송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報)』 -1895년 3월 2일자에 기재되어 있다.
고순택은 몇 차례의 심문을 받은 후 다시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하는 법무아문(法務衙門) 산하 권설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았다. 3월 3일자 판결선고서 원문을 보면, “전라도 무장 거주 농업 평민 고순택은 나이 38세로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당에 투입하여 지방안녕을 해(害)하기로 집포(緝捕)하여 본 아문으로 잡아 보냈기에 해당 재판소에서 별도로 심문을 행한즉 피고 등이 동학당에 투입하여 지방안녕을 해하는 증빙이 적확치 못한지라. 이러한 이유로 피고 고순택을 무죄방송(無罪放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판결선고는 법무아문 협판 이재정(李在正), 참의 장박(張博), 주사 김기조(金基肇)의 명의로 되어 있고, 경성주재 일본 영사 우치다(內田定槌)가 입회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동학농민군으로 법무아문 판결문에 이름이 확인되는 인물은 170여 명에 달했다.
이어지는 보복 처형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는 예상과는 달리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 후 석방된 것이다. 그러나 고순택은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 정읍에서 동료 3명과 함께 민보군에 다시 체포되어 3월 30일 ‘사자등’이라는 곳에서 총살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부인이 대나무 지게로 겨우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
농민군의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가족 역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보복을 두려워한 그의 부인은 당분간 광 뒤에 굴을 파서 생활하였고, 이후 큰아들과 함께 쪽물염색을 부업으로 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1994년 5월 친 손자 고재호 등 후손들이 그를 기념하여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입구에 추모비(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의장 추모비[甲午東學農民軍 高昶柱義將 追慕碑])를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