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비서로서 대원군과의 연결을 주도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송희옥(? ~ 1894?)
성균관대학교 HK교수
배항섭
전봉준의 비서로 동학농민혁명에 투신하다
송희옥은 전봉준의 처족(妻族) 7촌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집강소 시기에는 전라좌우도 도집강을 맡아서 활약했다. 그는 1차 봉기 때부터 전봉준의 비서를 맡는 등 혁명 초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2차 삼례 봉기 때도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송희옥이 전라좌우도 도집강을 맡고 있던 집강소 시기인 8월 10일 궁내부 선공주사(繕工主事)의 관직에 제수되었다는 점이다. 그의 관직 제수가 전봉준과 대원군의 사전 협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원군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직에 부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대원군과 전봉준 간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한다.
전봉준과 대원군의 연락을 도맡다
송희옥이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 사실은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 직전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894년 9월 2일 대원군 측 주사(主事) 두 사람이 효유문을 가지고 전주로 내려와서 송희옥과 만났다. 효유문의 내용은 농민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송희옥은 이들에 대해 미심쩍어 하였으나, 그들을 만난 다음날 전주 대도소를 철폐하고 구촌으로 갔다. 대원군이 보낸 주사 2인은 효유문을 가지고 남원의 김개남에게로 갔으며, 김개남을 이들을 믿지 못하고 두들겨 팬 다음 가두어 버렸다.
송희옥에게는 이틀 뒤인 9월 5일 대원군이 보낸 또 다른 밀사 두 사람이 찾아왔다. 이들은 박동진과 정인덕이었다. 송희옥은 이들을 통해 대원군이 9월 2일 효유문을 보낸 것은 개화파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대원군의 본뜻을 전하기 위해 다시 밀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송희옥은 이 밀사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둘을 잡아 두고, 그 다음날 바로 전봉준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며 급히 와서 이들을 직접 만나 볼 것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전봉준공초」에 따르면 전봉준은 삼례로 가서 이 밀사들을 만났다. 밀사들이 가져온 밀지의 내용은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북상하라는 것이었다.
이 무렵 전봉준은 또 다른 밀사인 이건영도 만났다. 이때 이건영은 국왕이 보낸 밀지라는 글을 전했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너희들은 선대 왕조로부터 교화하여 내려 온 백성들로서 선왕의 은덕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다. 조정에 있는 자는 모두 저들에 아부하고 있어 서로 은밀히 의논할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어 하늘을 향하여 통곡할 따름이다. 방금 왜구들이 침범하여 화가 국가에 미치었는 바 운명이 조석에 달렸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약 너희들이 오지 않으면 박두하는 화와 근심을 어떻게 하랴. 이로써 교시하노라. 」
국왕이 직접 농민군들의 출병하여 서울로 북상할 것을 교시한 내용이다. 일본 측에서는 이글에 대해 “동학당을 선동하기 위해 발송한 국왕의 밀지”라고 하면서도 “아마도 이것은 대원군의 조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전봉준은 국왕의 밀지가 도착한 사실과 그에 대한 비밀을 당부하는 회람을 의룡(義龍), 월파(月波), 화중(和中) 등으로 명기한 동지들에게 돌렸다. 위의 밀지는 국왕이 직접 작성한 것인지 대원군이 국왕의 이름으로 밀지를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원군이 조작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송희옥의 최후
대원군 측 밀사가 장소를 수차례나 송희옥을 먼저 찾아갔다는 점도 그가 대원군 측과 전봉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어쨌든 일본 측은 대원군과 전봉준이 송희옥을 매개로 접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고, 전봉준이 체포된 뒤 대원군과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하였다.
전봉준은 체포된 뒤 일본 측의 심문을 받을 때 대원군과의 관계에 대해 부정하였으나, 거듭되는 심문 끝에 그가 보낸 밀사를 만난 사실을 실토하였다. 물론 송희옥에 대해서도 ‘허망한 부류’라고 하여 그와의 관계가 대단한 관계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농민군과 대원군과의 관계를 숨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송희옥의 최후는 전봉준에 의해 확인되었다. 공초에서 밝힌 것이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고산에서 민보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전봉준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들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