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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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8호
동학농민혁명의 근본정신을 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근본정신을 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학농민혁면 참여자 문홍채의 손, 시인 문병순


  가사문학의 발원지이자 현대문학 최대의 작가 배출지인 문학관광기행특구 장흥에는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 중 하나인 장흥 석대들 전적지가 있다. 이곳은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문흥채 님의 손자 문병순 유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오는 관문 격인 장평면 봉림리에 ‘계명성문학찻집’이 있다. 황토벽에 기와를 얻은 집 한켠에는 다양한 형상의 시비가 빼곡이 서있었다. 시 쓰는 농부, 100여개가 넘는 시비를 세우고 시화전시실 겸 낭송실도 소유하고 있는 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 유명인이시지만 독자 분들에게 본인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장흥군 장평면 봉림마을에서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며 시 쓰는 문병순입니다. 2002년<한맥문학>에 시가 당선하면서 통해 늦깎이로 등단해서 8권의 시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계명(鷄鳴)’이라는 아호를 딴 문학찻집을 열었고, 얼마전부터 식당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부터 뒷마당까지 100여 기가 넘는 시비를 세워 시비공원을 만들고 있습니다. 



문) 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답) 할아버지는 화순, 장흥, 보성, 영암 지역의 집강이셨습니다. 지역에서 꽤 활동적으로 활동하셨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1894년 11월 장흥 흑석장터에서 동학농민군 집결시 밀서전달 임무를 담당했고, 12월 석대들전투 과정에서 밀서전달과 군자금 공급을 맡았다고 합니다. 대자리나 바구니 같은 죽세품을 만들어 보부상에게 팔아 전투자금을 마련하고 장사꾼들을 대밭에 모이게 하여 자금전달 등에 관여했다고 들었습니다. 1938년 70세로 사망하실 때까지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문) 당시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답)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셨을 때는 최후격전 시기로 조정의 탄압이 가장 극심하던 때였습니다.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는 것이 발각되면 삼족을 멸하였고, 사형 시에는 유지기형(짚을 모아 끝을 묶어 사람 머리에 씌우고 불을 붙여 화형 시키는 형벌)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까지 입단속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할아버지께서도  은신생활도 하시고 수차례 이름도 바꿔서 문서에서 확인된 기록된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무엇보다 갑오년 당시 활동으로 많은 빚을 지셨고,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저의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이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할아버지의 활동자금으로 들어갔으니 집안 살림은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대에까지 이 빚을 갚았을 정도니까요. 



문) 수많은 시를 쓰셨는데, 동학농민군이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시도 있을까요? 


답) 글을 배우면 탐관오리가 된다고 익히지 못하게 하셨던 조부님의 말씀과, 죽새품을 만들어 밀서를 전달하는 상황까지 제가 들어왔던 동학농민혁명에 관하여 사실적으로 쓴 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두 시중에 ‘뻐꾸기 울거나 말거나’는 계명성 문학 찻집 입구에 시비가 있습니다.


  뻐꾸기 울거나 말거나

  뻐꾸기 운다고 / 찔레꽃 향이 더 짙으랴마는 / 오동 꽃이 떨어질 무렵인 탓도 있고 / 꾀꼬리 머리 빗고 할 메 집 갈 때 / 황금빛 저고리에 풀물 내음 배일까 봐서일 테지 // 사월의 끝자락을 보내고 / 쪽빛 바닷물 퍼 올려 앞산 푸르게 하느라 / 쪽 쪽 쪽 농부의 새벽잠을 깨운다 // 나도 이제 / 뻐꾸기 울거나 말거나 // 지금껏 미루어 온 어머니 분소에 / 다가올 추모일 향을 올리기 위해 / 백합이나 심으러 가야하겠다. //

  *뻐꾸기: 외세, 담살이 / 새: 밀서를 건네 참여를 돕는 동학농민군 


  동학과 나

  내 할아버지 / 할머님께서 그랬다 / 글 읽히면 탐관오리 된다고 / 그리고 잡히면 삼족이 유지기형 당한다고 / 가승을 싸들고 집안을 떠나 산골에서 화전을 일구며 // 거문두리 소나무 밭과 / 흑석대나무 숲 장터에서 /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智 / 人乃天사상으로 / 죽 새품 도부 상에 옷소매 속에 / 밀서를 감추고 전달하며 // 세기를 앞서 / 민주의 기초를 다진 / 거룩한 동학 혁명군 나의 할아버님 / 동학후예들이여 이제부터 / 기치를 높이 들고 / 승승장구 할 때가 되었노라 //

  ※ 유지기형 : 짚 토마의 끝을 묶어 사람 머리에 씌우고 불을 놓는 형벌



문) 농사가 시 창작에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답) 농사는 수입이 따라와야 합니다. 이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곡식을 가꿀 때 ‘이것을 길러 얼마를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이것을 어떤 모습으로 키워야겠다.’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매사에 주변을 관찰하고 생각에 힘을 쏟는다면, 그 곡식이 자라는 것처럼 생각의 열매도 맺힐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실패했을 경우의 참담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농사 자체가 자연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농부로서 감내해야할 부분입니다. 생산적인 시 창작 과정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만큼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는 거죠.



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정신을 잇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언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답) 당장은 쉬운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재단에서 계획하고 있는 국가기념일 제정과 기념공원조성을 빠르게 끝마쳐 동학농민혁명 정신선양의 기틀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원활한 정신선양을 위하여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유적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연구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에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알리고 교육 표지판을 세우고 기념물을 만드는 등의 작업으로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지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단지 전투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내용, 그 과정 등을 밝혀 근본정신을 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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