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집회와 교조신원운동의 시작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동학 공인(東學 公認)을 위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동학교단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부터 변모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라고 불리는 동학공인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동학교단의 첫 번째 집회는 1892년 10월 충청도 공주에서 열렸다. 당시 공주에는 충청도를 관할하는 충청감영이 있었다. 동학교도들에 대한 관의 수탈이 계속되자 서인주, 서병학 등 교단의 중견지도자들은 1892년 7월부터 최시형에게 동학의 교조(敎祖), 즉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하자고 건의하였다. 최제우 신원운동이란 최제우의 죽음이 억울한 것이었음을 조선정부로부터 인정받자는 것이다. 만일 조선정부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조선정부가 동학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즉 최제우 신원운동은 동학 공인운동인 셈이다. 중견지도부의 요구에 신중을 거듭하던 최시형은 마침내 이를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1892년 10월 17일 최시형이 신원의 방법을 찾으라는 통문을 내린 것을 계기로 서인주 등의 주도하에 공주집회가 개최되었다.
동학교단 지도부, 충청감영에 모여 스승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
동학교단 지도부는 청주 남쪽 솔뫼에 있는 손천민 접주 집에 본부를 설치하고 주요 지도자들이 모여 집회를 준비하였다. 충청감사에게 제출할 의송단자는 손천민이 작성하였다. 그리고 각 접주에게 통문을 전달할 사람을 뽑아 10월 17일 동학교단의 각 포(包:여러 개의 접을 관할하는 동학교단의 조직)에 입의통문을 전달하게 하였다. 입의통문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 스승님께서 화를 당한지 벌써 30년이 되었다. 그 제자된 자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힘써 신원의 방도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만약 여기서 신원하지 못하면 황천에라도 따라가서 의젓이 가르침에 참여한 우리들은 제자로서의 의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중략) 바라건데 여러 도인 군자들은 스승님을 신원할 방도를 도모하는 데 두렵게 생각하지 말 것이며 조화만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다.”
드디어 1892년 10월 20일이 되자 각지에서 모여든 동학도 1천여 명은 10월 21일 공주의 충청감영 앞에 모여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교조신원을 위한 의송단자를 제출하였다. 의송단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스승님은 사도(私道)로 무고(誣告)되었으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의에 따라 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 여기고 신자(臣者)의 직분으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아! 벌써 30년이 되도록 세상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는 신원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저희들이 성심 수도하면서 밤낮으로 한울님에게 축원하는 것은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원뿐이니 어찌 털끝만치라도 그릇된 이치가 있겠습니까? (중략) 바라건데 자비를 베풀어 넓으신 덕으로 외읍에 갇혀 있는 사람들(동학교도)을 모두 풀어주는 특별한 조치를 내려 주시고 임금님에게 계달하여 스승님을 신원하여 주기를 피눈물로 우러러 호소하며 큰 은인이신 관찰사 합하에게 업드려 비는 바입니다.”
충청감사 조병식,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을 금하다
의송단자를 받은 충청감사 조병식은 하루만인 10월 22일 다음과 같은 제음(백성이 관청에 제출한 진정서 등에 대해 관청에서 써 주는 처분)을 동학교도들에게 내렸다.
“동학을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은 오직 조정의 처분에 달렸으니 영문(충청감영)도 역시 조정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이는 사실 본영(충청감영)에 와서 호소할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무엄함은 마땅히 엄하게 처벌해야 하나 기왕에 호소해 온 백성들이라 특별히 용서하니 모두 알았으면 곧 물러가 각기 그 업에 따라 편안케 하라. 각자가 미혹에 빠진 것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양민으로 귀화하면 다행일 것이며 또한 조정으로서도 다행일 것이다. 만약 퇴거하지 않고 다시 소원한다면 어찌 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청감사의 제음을 받은 동학지도부는 내용을 검토한 끝에 아무런 조치가 없으므로 시위를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충청감사에게 납득할 조치가 없는 한 물러설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자 감사 조병식은 각 군현 수령들에게 다음과 같은 감결(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는 문서)을 내려 보냈다.
“이번에 제소한 것을 실로 절박함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되었으니 우선은 안정시킬 방도는 무고한 백성을 살려야 한다. 이제부터는 교졸과 관예에 명하여 일체 횡침을 못하게 하여 편히 생업을 얻도록 할 것이며 깨닫지 못하면 죄줄 날이 없으랴. 용서하여 하회를 기다려 개선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바라는 바는 이 뜻을 진서와 언문으로 번역 등서해서 마을마다 내붙여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 감결이 도착하는 날로 거행하고 그 전말을 보고토록 하라.”
동학지도부는 충청감사의 감결을 받아보고 의외라고 여겼다. 그동안 각 고을 수령들이 행한 침탈을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동학의 제소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이해하였으며 각 수령에게 이후부터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을 금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다. 내용을 확인한 동학지도부는 10월 25일 동학도를 해산하여 충청감영 앞에서 집회를 철수하였다.
공주집회는 동학공인운동 즉 교조신원운동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동학의 종교적 울타리에서 벗어나 당시 조선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리고 비록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지방관들로부터 공공연하게 수탈을 당해야 했던 동학교도와 동학교단에게는 이러한 공주집회의 결과는 매우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동학교단은 삼례집회를 통해 교조신원운동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참고문헌
신순철·이진영,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서경문화사, 1998
표영삼, 『동학 2 - 해월의 고난 역정』, 통나무,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