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찾기 위한 2012년도 특별전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관운영부 학예사
박아영
<동학농민군 진압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수집문서 발견>

2010. 12. 11.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수집문서 35점 사진 촬영
지난 2010년 3월,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님과 일본 홋카이도 대학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명예교수님의 기나긴 노력에 잇따른 성과로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수집 문서가 그의 손자로부터 일본 야마구치현문서관(山口縣文書館)에 기증된 바 있다.
이것은 곧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수집문서는 앞으로 야마구치현문서관(山口縣文書館)이라는 공공기관을 통해 일반대중에게 공개 및 열람이 가능해짐을 뜻하는 것으로 1894년 제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수집해서 일본으로 가져간 이후 그 유무조차 확인할 길이 없던 문서를 우리나라에서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셈이었다.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직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대대장으로 1894년 11월 6일 인천을 통해 조선 땅에 침입하였고, 조선 서남쪽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동학농민군을 거칠게 탄압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 각 지 수령과 동학농민군 진압에 관해 주고받은 문서들을 모아 본국으로 가지고 갔고, 현재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살고 있는 그의 손자가 기증을 결정하기 전까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서의 존재가 파악된 이후, 조선 땅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을 목적으로 수수(收受)한 문서인 만큼 어떤 인물과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그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2010년 12월에 박맹수 교수님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이용이 처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이 일본 야마구치현문서관을 방문하여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수집문서 가운데 동학농민혁명 관련 문서 35종을 카메라로 촬영하였고, 촬영한 문서는 국내의 권위 있는 연구자들을 통해 내용 분석 및 한글 해석본 작성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별전시를 통한 국내에서의 소개>
2011. 12. 14. 협약서 확정 전 협약 내용의 조율을 위한 협의
우리 재단은 118년 전 일본군이 조선 땅에 들어와 자행한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가 드러난 새로운 발견 문서를 학자들의 연구단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나아가 국내 대중에게 공개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영석 이사장님의 깊은 관심과 배려로 금번 특별전시를 기획하였다.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일본군 수집문서에 드러난 동학농민혁명은 어떠한지, 또 다른 관련 문서의 잠재 가능성은 있는지 등을 함께 생각하고, 동학농민혁명을 통한 애국·애족 사상 고취를 위한 장으로서 전시가 적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취지로 시작된 전시가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물을 운반하여 열리는 국제전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갑과 을로 대변되는 각 기관이 전시를 진행함에 있어 수반하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약속이 담긴 협약서 작성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문서 대출 전에 일본 야마구치현문서관 측에서는 우리 기념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 검토를 원하였다. 일본 문서관 측에서 검토를 요청했던 부분은 전시장에 상시 근무하는 경비요원 현황, 전시장 내 보안카메라와 조명 등의 조건, 수장고 적정 온·습도 유지 여부 및 수장고 내 감시카메라 상황 등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 등이었고, 메일을 통하여 관련사진과 문서를 주고받으며 검토와 보완을 하는 방법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또한 유물 통관과 국제운송에 필요한 자료의 구비와 도난·파손·자연재해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국내 박물관보험에 가입하였다. 2011년 12월에는 지난 1년여 간 서면으로 협의한 사항을 반영하여 만든 협약서를 조율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야마구치현문서관(山口縣文書館)을 방문하였고, 유물 대여 전반에 협의를 마친 야마구치현문서관(山口縣文書館)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12년 1월에 전시 유물 대여 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사실 협약을 맺은 이후에도 국제전시를 치른다는 부담과, 역사를 놓고 마주하기에는 아직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인식이 있는 일본과의 전시인 까닭에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우호적으로 많은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야마구치현문서관(山口縣文書館)의 카나야 마사토(金谷 匡人) 부관장님과 여러 관계 직원들 덕분에 부담감이 책임감으로 바뀌어 전시 제반 업무에 주력할 수 있었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각종 언론매체의 보도>
118년 전 우리 땅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문서가 국내전시를 통해 소개된다는 사실을 접한 각 언론매체는 그간 뜸했던 새로운 자료의 출현에 대단한 관심을 표하였는데, 인터넷 기사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하였다. 먼저 TV를 통해 KBS 9시 뉴스, KBS 뉴스라인, KBS 전주 뉴스9시에서 「일본군 눈에 비친 동학농민혁명은?」 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보도하였고, 이후 KTV 한국 정책방송 ‘박물관 나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전시 전반을 생방송으로 30여분 방송 한 바 있다.
또, 신문매체로는 ‘전북일보’ 「동학군 모조리 살육하라... 그날의 아픔을 보다」, ‘조선일보’ 「동학농민군, 스나이더 소총(일본군 신식무기)에 쓰러지다」, ‘한겨레 신문’ 「1894년 일본군에 눈에 비친 동학농민혁명은.....」, ‘경향신문’ 「동학농민혁명 진실 찾기 특별전시회」 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시 개막을 전후하여 신문 지면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보도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오랜 기간 동안 ‘난(亂) 또는 폭동(暴動)’ 등으로 평가절하 되어 왔던 탓에 자손들은 아버지 또는 조부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숨기며 살아왔고, 따라서 전해오는 문서를 비롯한 관련 자료의 현존 수량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번 일본군 수집 문서 발견에 대해 언론매체들은 동학농민혁명 사료 발굴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는 표현과 함께 향후 추가 자료 추적 및 발굴을 통한 동학농민혁명의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연구와 분석이 병행되어지길 희망하였다.
앞으로 우리 재단은 위와 같은 보도내용을 수렴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국내와 세계로 확대하기 위해 산재한 자료의 수집 및 연구를 지속할 것이며, 대중에 소개하기 위한 전시 또한 적극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올해 연말까지 이어지는 본 전시는 6월 21일까지 문서의 진본 관람이 가능하며, 이후에는 복제문서를 전시할 계획이다. 끝으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과정을 거쳐 기획된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찾아가다’ 전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