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의 시선으로 본 동학농민혁명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시 패널
•시선 하나 / 여행가, 무장한 개혁자를 보다.
•시선 둘 / 외교관, 완벽한 승리자를 보다.
•시선 셋 / 언론인, 순수한 애국심을 보다.
•시선 넷 / 선교사, 혁명가의 개혁을 보다.
지난 5월 12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기획특별전을 개막하였다. 반봉건 민주항쟁이자 반일 민족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반란사건으로 왜곡·축소되었다. 그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들이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나 해석은 이 사건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 조선정부나 유림, 혹은 일본 측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제한성이 많았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1894년 당시 조선에 머물렀던 서양인이 직접 겪고 남긴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서양인들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조선정부나 유림, 일본의 기록 등에 나타난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머물던 서양인들은 동학농민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순수한 애국심(Honest Patriotism), 개혁자들(Reformers), 혁명가들(Revolutionists) 등의 표현을 통해 기본적으로 동학농민군의 애국애족정신과 개혁사상을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의 눈에 동학농민군은 낡은 봉건체제를 개혁하고 일제의 국권침탈을 막고자 목숨을 걸고 일어난 의로운 혁명집단으로 비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선 하나) 여행가, 무장한 개혁자를 보다

영국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년), 오스트리아의 여행가 어른스튼 폰 헤세바르텍(1851~1918년), 독일의 신문기자 루돌프 자벨(1876~1939) 등의 여행기에 기록된 조선의 모습과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저술한 책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을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소개한 기록한 대목이 눈에 띈다.

‘… 사람들은 동학농민군이 부패한 관료들과 배반한 밀고자에 대항해 우발적으로 봉기한 농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권에의 확고한 충성을 고백하는 그들의 선언으로 판단해 볼 때, 한국 어딘가에 애국심의 맥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농민들의 가슴속 뿐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 비록 더 중요한 문제의 등장으로 그 존재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여느 민란보다는 중요한 운동이었으며 서울과 다른 도시들에서도 그 숫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명분도 뚜렷하고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 ’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사벨라 버드 비숍, 205~208p
시선 둘) 외교관, 완벽한 승리자를 보다
독일의 외교관 막스 폰 프란트(1835~1920년), 러시아의 외교관 제노네 볼피첼리(1856~1936) 등의 저서에 기록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 및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국내·외의 결정적인 사건들(갑신정변, 임오군란,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등)을 다뤄 서양인들에게 처음으로 한국을 널리 알린 유명한 개설서 『한국, 은둔자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 1897.)도 전시되어 있다.

‘… 동학농민군은 패주를 가장하여 정부군의 추격을 유도해 교묘하게 위장한 매복 장소로 끌어들였다. 동학농민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고위 장수 한 명과 병사 300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 다음 날인 5월 31일에는 서울 조정에도 이 참사가 보고되면서 엄청난 불안감이 수도를 휩쓸었다. … ’
- 『청일전쟁』(The China-Japan War), 제노네 볼피첼리, 1896, 61p
‘… 몇 년 전부터 전라도 지방에서는 폭동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기운은 처음에 고종의 외국인 우호정책과 특히 기독교 선교의 허용 방침에 반발한 것이었지만, 관리들의 탐욕과 강탈로 말미암아 더욱 고조되었다. 1893년 봄에 이 지방의 폭도들이 수도 가까이에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비록 서울에 있는 외국인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하더라도 모든 일은 일본 공사관 측의 공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폭동을 일본의 이해관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확대 해석하여 자연스럽게 일본의 개입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 ’
- 『동아시아 문제 : 중국·일본·한국』(Ostasiatische Fragen : China Japan Korea), 막스 폰 브란트, 1897, 238~239p
시선 셋) 언론인, 순수한 애국심을 보다
근대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친한(親韓)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는 매킨지(1869~1931년)의 저서와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서양 언론 기사를 통해 청일 전쟁 및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 한국의 일반 백성의 삶은 노예의 삶과 다를 게 없다. 한국 남부 지방에서 발생한 최근의 반란(동학농민혁명)은 점차 전국으로 번지고 있는데, 그 성격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고통에 신음하는 민중의 봉기로서 무자비한 조정의 폭정에 반기를 든 것이다. …’
- 뉴욕주간 저널‘하퍼스위클리’(Harper’s Weekly), 미해군 경리감, 유스터스 B.로저스)
‘… 동학농민군이 표방한 내용은 일본인과 서양인을 한국으로부터 추방하고 권력층의 횡포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중국과 문제를 야기시키려는 일본인들에 의해 조장된 것이었다. … 한국은 수백 년에 걸쳐서 비밀 결사가 만연하던 나라였다. 이제는 동학이라는 집단이 나타나서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집단은 반외세·반기독교적이다. 애당초 유럽인들은 그 훗날 중국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의화단을 인식했던 것과 같은 시각에서 동학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들을 되돌아볼 때 동학 운동에는 순수한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 …’
- 『한국의 비극』(Korea’s Fight For Freedom), 프레드 아서 매켄지, 1920, 38~44p
시선 넷) 선교사, 혁명가의 개혁을 보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윌리암 존 매켄지(1865~1907년),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1859~1921년), 제임스 게일(1863~1937년),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1867~1947년),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년) 등의 저서에 나오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 나는 이 동학군들이 견고한 구습을 타파하기 시작했다고 믿습니다. 완전한 전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사람들은 서서히 자율적인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인명피해는 불가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좋은 결실이 맺어질 것입니다.…’
** 윌리엄 존 매캔지가 1894년 11월 초에 서울에 있던 기포드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
- 『한 알의 밀알』(A Corn of Whea), 엘리자베스 맥컬리, 1903, 167p
‘… 이 집단의 구성원 중 일부는 단지 강도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잘못과 억압으로 인한 절망 때문에 격발한 사람들로서, 모든 것을 걸고 더 나은 환경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 처음에는 왕조에 충성했으나, 정부의 적개심과 백성의 슬픔이 중국의 태평천국군처럼 동학농민군들을 혁명가로 변화시켰다. … ’
- 『극동의 지배』(The Mastert of The Far East), 아서 주드슨 브라운, 1990년대, 60~61p

‘… 어쨌든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반외세적이다. 의화단 운동은 초기에 동학과 같이 반외세적 성격을 띠었으나, 나중에는 국내의 정치개혁을 위한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동학은 후자의 성격을 먼저 띠었다. 그러나 한국에 오랜 세월 내려온 유교적 배타성과 반외세주의 정책은 동학농민군으로 하여금 이방인과 이민족의 출현에 대항하도록 이끌었다.’
- 『선교와 근대 역사』(Missions and Modern History),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 1904, 375p
‘… 그러나 12월 일부 일본군대의 원조를 받은 한국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다음 해 봄에 반란세력은 꺾여 봉기는 진압되었다. 그래서 비숍 여사가 ‘옛 역사의 사소한 하나의 장’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과연 이 사건이 사소하다 보는가? 이것은 깊은 정치적 억압이 표출되어 나타난 하나의 운동이다. 이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 생명을 걸도록 만들었다. … ’
- 『선교와 근대 역사』(Missions and Modern History),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 1904, 379~38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