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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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 33호
전남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전남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에서 내려다본 석대들전적지

장흥석대들전적지

석대들전적지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164-5 일대
• 국가사적 제498호
  1894년 12월 15일 장흥 일대 동학농민군 3만 여명이 일본군, 관군, 민보군으로 구성된 연합부대를 맞아 전투를 벌인 장소이다. 석대들전적지는 현재 장흥읍 남외리 부근 국도변에 위치한 석대 앞의 들판을 말한다. 장흥 일대 동학농민군은 12월 4일 벽사역, 5일 장녕성, 7일 강진현, 10일 강진병영 등을 차례로 점령한 뒤 장흥으로 되돌아온 날이 12일이었다. 이 무렵 일본군 미나미(南小四郞)의 지시를 받은 나주의 관군이 영암, 능주, 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왔고, 12일부터 15일 사이 일본군과 이규태 부대가 장흥으로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일본군과 통위대 교장 황수옥(黃水玉)의 부대를 맞아 벌인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퇴각한 동학농민군은 3만 여명의 대군으로 이들 부대가 12월 15일 일본군과 관군으로 구성된 연합부대를 상대로 석대들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도 패한 동학농민군은 장흥의 부용산과 천관산, 해남과 진도 등지로 숨어들었다. 석대들전투의 의미는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와는 별도로 전라도 남해지역에서 반일항쟁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전남 장흥군 장흥읍 읍성로 2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석대들전적지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8호로 지정되면서 장흥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홍보영상관과 전시관 등으로 구성된 기념관에는 석대들전투 모형 전시, 당시 농민군이 사용했던 화승총의 총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장흥·강진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양상 (1)
  장흥·강진지역에서 맨 처음 동학에 입교한 사람은 1864년 장흥군(현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 박병락(朴炳樂)과 그의 부인 문방례(文方禮)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약 30년 후인 1890년대 초반기로 동학교단의 활동이 강원도와 경북 산간지역을 벗어나 전라도와 충청도 내륙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1892~1893년 전라도와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 과정을 통해 활동력을 키운 장흥·강진의 이방언, 이인환, 구교철, 이사경 접주 하의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부대와 함께 무장기포, 황룡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참가했다는 것을 오지영의 『동학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조선정부의 파병 요청으로 청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일본군도 진출하자 외국 군대 철병요구를 위한 명분을 위해 전주성을 비워달라는 관군 측과 화약(和約)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장흥·강진지역 동학농민군은 고향으로 돌아와 6월 20일경 부산면 자라번지, 7월 3일에는 장흥읍내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에 나섰다.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양상 (2)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1894년 여름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치정세는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조선정부의 철병요구를 거부한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한 뒤 청일전쟁이 도발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을 개혁하던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초 반일항전의 기치를 올리고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이방언 대접주를 비롯한 장흥·강진지역의 동학농민군도 2차 봉기에 참가하였으나 남해를 통한 왜적의 침입과 든든한 후방기지 역할 수행을 위해 상당수의 동학농민군은 북상하지 않고 잔류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북상하자 나주의 수성군과 전라도 남부지방의 토호세력들이 결집하여 농민군을 침탈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10월 중순부터 장흥·강진·함평·나주·무안·능주 등지에서 농민군의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영암·덕교·강진 등지의 농민군이 장흥으로 모여들자 장흥부사 박헌양은 벽사역의 역졸과 전라병사 휘하 병영군 3천여 명을 모아 대응하였다.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양상 (3)
  장흥지역에서 동학농민군과 수성군 사이에 벌어진 공방전은 12월 4일부터 시작되었다. 4일 새벽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평지에 위치한 벽사역관을 향해 포를 쏘면서 기습하였고, 이에 놀란 역졸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벽사역은 쉽게 함락되었다. 여세를 몰아 동학농민군은 5일 장녕성(長寧城) 정문인 동문을 부수고 성으로 돌입하여 부사 박헌양을 붙잡아 처형하였다. 이어서 동학농민군은 7일 강진성, 10일 강진병영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12일 장흥으로 다시 돌아왔다.
  장흥으로 돌아온 동학농민군 3만여 명은 12월 15일(양력 1895.1.10.) 석대들에서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본부 및 제3중대와 교도중대장 이진호(李軫鎬)가 이끄는 부대를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대흥, 관산, 강진지역 접주들을 중심으로 장흥 인근 고읍(古邑) 대내장(竹川場, 玉山)으로 후퇴한 동학농민군 4~5천명은 12월 17일 일본군·경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장흥의 부용산(芙蓉山)과 천관산(天冠山), 해남과 진도 등의 섬으로 피신하였다.

동학루(東學褸) ·동학농민혁명기념탑

동학루(東學樓)                                                                                      동학농민혁명기념탑
• 전라남도 장흥군 충열리 산 8~3
• 사적 제498호
  동학루와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은 1992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가 구성되어 석대(石臺)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건립하였다. 건립부지 3,600㎡, 탑의 높이가 11.6m인 기념탑은 장흥군비 210백만원을 투입하여 1990년 5월 착공, 1992년 준공하였다.
  이후 장흥석대들전적지(長興石臺들戰蹟地)는 문화재청에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98호(2009. 5. 11.)로 지정하였다. 사적의 총 면적은 35,700㎡으로 ①동학농민혁명 석대들전투지(석대들판) ②동학농민군이 깃발을 꽂았다고 전해지는 석대(石臺) ③장흥지역 전투에서 사망한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영회당(永懷堂) 등을 아우르고 있다.

장흥관아 터(농민군 점령지)

장흥관아 터                                                                                         장흥관아 터 표지석
• 전라남도 장흥군 동동리 187-1 일대
  장흥관아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이다. 1949년까지 장흥군청으로 사용되다가 1953년부터 1973년까지 장흥농업기술학교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현재 관아 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동헌 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창리 농민군 집결지

사창리 동학농민군 집결지(現 장평면사무소, 現 장흥면민회관)
•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용강리 27-1 (장평면사무소 일대)
  1894년 갑오년 당시 농민군이 벽사역과 장령성 공격에 앞서 집결한 장소이다.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던 사창리는 현재 장평면사무소 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벽사역(碧沙驛) 터

벽사역 터 및 동학농민군 처형지 부근의 비석들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75-2
  1894년 12월 4일 동학농민군은 벽사(碧沙) 찰방역참(察訪驛站)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퇴각시킨 후 이곳을 체포한 동학농민군을 가두어두거나 처형 장소로 사용하였다. 당시 벽사역의 위치는 건산리 75-2번지 일대로 알려져 있다.

관산 [고읍, 古邑]

관산전투지, 옥산 대내장(玉山, 竹川場, 현재 관산읍사무소)
•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421-3 일대
  장흥석대들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장흥에서 남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관산, 고읍(대내장 竹川場 또는 玉山)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다가 12월 17일(양력 1895.1.12.) 관산으로 들어온 일본군과 경군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그 장소가 현재 관산읍사무소 일대이다.

대접주 이방언 묘, 묘비

대접주 이방언 묘, 묘비
•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접정리 산 26-1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지역 대접주였던 이방언 대접주의 묘와 묘비이다. 부인 함양 박씨와 합장된 이 묘는 이방언이 살았던 마을 뒷산(접정리 산 26-1)에 있다. 남도장군인천이공방언지묘(南道將軍仁川李公芳彦之墓)라고 새겨진 묘비는 1982년 후손들이 세웠다.

이방언(李邦彦, 1838-1895) 대접주
  장흥 용산 묵촌 태생으로 자는 자방(子邦), 호는 방언(芳彦), 본명은 이민석(李民錫)이다. 대제학(大提學) 이문화(李文和)의 후손으로 부친은 장흥향교 용산리 향약 청원계의 도정 이중길(李重吉)이다. 유학자인 고산(鼓山) 임헌회(林憲晦)의 제자로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과 동문수학하였으나 주자학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1890년 무렵 동학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입교한 후 장흥의 접주로 활동하였다. 이후 보은집회(1893.03), 무장기포(1894.03), 장성 황룡전투(1894.04), 전주성점령(1894.04.)에도 참가하였다. 특히 장성 황룡전투 때는 장태를 고안해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성 함락하고 전주화약을 체결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이방언은 새로 부임한 장흥부사가 동학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9월에 다시 봉기하여 벽사역, 장흥부, 강진병영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다가 12월 15일 석대들전투에서 일본군 및 관군에게 패배하여 12월 24일 체포되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된 이방언 대접주는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1895년 4월 27일 다시 체포되어 장대에서 처형당했다.

영회당(永懷堂)

영회당 전경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78
  1894년 12월 5일 벌어진 장령성전투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장흥부사 박헌양과 장령성전투에서 전사한 96명의 수성군 장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안내문을 통해 1898년 순절단, 1899년 순절비를 설치하였고, 192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영회당을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봉안된 위패는 장령성전투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장흥부사 박헌양, 장흥부의 기실(記室, 부사 측근에서 기록을 맡았던 벼슬) 박영수(朴永壽), 장흥부 수성별장 임기남(任璂南), 통장(統將) 주두옥(周斗玉), 호위장(護衛將) 주열우(周烈佑) 등이다.

갑오동란수성장졸 순절비 (甲午東亂守城將卒 殉絶碑)

[비각] 갑오동란수성장졸 순절비                                                                                                     갑오동란수성장졸 순절비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산 6-3
  1894년 12월 5일 동학농민혁명군이 장흥부가 있던 장녕성(長寧城)을 함락시킬 때 전사한 장흥부사 박헌양을 비롯한 96명의 수성군 장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1899년 송사 기우만이 비문을 지어 순절단 옆에 이 비를 세웠다. 1928년 현 위치로 옮겨진 순절비는 상단에 ‘光緖二十年 甲午東亂守城將卒殉絶碑’ (광서이십년 갑오동란수성장졸순절비), 오른쪽 면에는 ‘贈內務參議行府使朴公憲陽’(증내모삼의행부사박공헌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라번지 집강소 터

자라번지 집강소 터 (원경)
•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금자리 980 일대
  1894년 6월 20일경 동학농민군이 장흥지역 최초로 집강소를 설치한 장소이다.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한 뒤 관군과 화약을 맺고 돌아와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대 터(농민군 처형지)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120-2(장흥서초등학교) 일대
  동학농민혁명 당시 체포된 많은 농민군이 처형된 장소이다. 장흥지역에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석대들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다음이었다. 석대들전투, 고읍 대내전투 직후 칠량면과 대구면 등지에서 일본군이 잡아들인 동학농민군은 45명, 관군이 잡아들인 동학농민군은 132명 등이다. 관군과 일본군은 체포한 동학농민군을 벽사역과 장대에서 처형하였다. 일본군이 장흥부근에서 처형했다고 공식적으로 보고한 인원만해도 300명에 이른다.
  1894년 12월 24일 체포되어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재판을 받았고 1895년 3월 21일 무죄로 석방된 이방언은 고향 장흥으로 내려왔다가 전라감사 이도재가 내린 토포령(討捕令)에 따라 다시 체포되어 이곳 장대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참고자료 |
- 『전남동학농민혁명사』, 전라남도, 이상식 외, 1996.
- 『순무선봉전등록』(巡撫先鋒陣謄錄),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2』,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7』,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 『다시 피는 녹두꽃 – 동학농민군 후손증언록Ⅰ』,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4.
-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 동학농민군 후손증언록Ⅱ』,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7.
- 『강재 박기현 선생의 일기 - 강재일사』, 강진군·영산원불교대학교, 2002.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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