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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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아버지와 아들 : 김성칠, 김흥섭 부자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아버지와 아들 : 김성칠, 김흥섭 부자


동국대 연구교수

조재곤



  전봉준과 김성칠 부자의 인연


  김성칠(金聖七; 1855~1901)은 광산 김씨로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지금의 고창군 소재지인 무장현 청해면에 거주하였다. 이후 무장현 공음면 신촌리로 이주하여 서당을 경영하면서 훈장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동학접주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93년 12월 10일 공음면 당산리 송문수(宋文洙)의 집에 전봉준이 잠시 몸을 피한 일이 있었다. 당시 김흥섭은 전봉준과 다른 동학농민군 접주 손화중, 정백현, 송문수 등 네 사람과 자리를 같이하고 전라감사 김문현의 폭정에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후 1894년 2월 19일에 공음면 신촌리의 김성칠의 집에 다시 모여 행동준비를 구체화하였다. 여기 모인 사람은 전봉준을 포함한 앞의 5명 외에 김개남, 서인주(장옥), 임천서, 김덕명,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각 읍의 접주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김성칠은 자신의 집을 남접의 본부로 활용토록 하였고, 이 때 쌀 50섬을 이들 동학농민군에게 흔쾌히 제공하였다 한다. 이후에도 김성칠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이때 그의 장남 흥섭은 전봉준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들은 전봉준의 진중수행원으로 활약


  김흥섭(金興燮; 1874~1965. 10. 28)의 도호는 영암(榮菴)이다. 그는 약관 21세 동학농민군이 기포한 1894년 3월 21일부터 전봉준의 진중수행원으로 정읍의 황토현전투를 비롯하여,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입성할 때까지 줄곧 종군하였다. 김흥섭은 기거와 침식을 전봉준 대장과 함께 하며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한다. 그는 전봉준 명의의 문서작성과 기록, 연락 등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군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같은 해 5월 전주에서 화약을 맺을 때까지 전봉준을 수행하였다. 그 후 9월 농민군의 대규모 재기포 때부터는 부친 김성칠이 집강으로 출진하였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전투에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에 의해 완전히 패한 후 김흥섭은 부안군의 변산반도 골짜기에서 약 5년간 피신생활로 겨우 불행을 면하였다. 공주전투에 참여하였던 부친 김성칠도 다행히 살아남았다 한다.



  김흥섭의 회고 기사


  이같은 사실은 김흥섭이 남긴 기록에서 밝혀진 것으로, 그러한 내용은 그의 사망 직후인 1965년 11월 5일자 중앙일보의 <동학난과 전봉준 장군-진중측근자 고 김흥섭 옹의 회고->라는 장문의 8단 기사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었다. 기사에서는 그의 선친이자 동학의 접주인 김성칠이 1894년 2월 모임 당시 군자금으로 쌀 50섬을 동학농민군에게 제공했으며 특히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신이 났었다고 밝힌 일도 있다. 김흥섭의 회고에는 고부농민봉기 당시의 사정, 무장기포 당시 전봉준의 활동,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 전투, 특히 전봉준이 피신 중 순창 피로리에서 체포될 당시와 순화중과 함께 장성 감옥에 갇혀 있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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