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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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가을 61호 유족 인터뷰
손으로 가린 입, 동학농민혁명의 비밀스러운 기억

손으로 가린 입,

동학농민혁명의 비밀스러운 기억


날짜 2025. 7. 15.(화) 

장소 전주 추담판소리보존회

참여자 홍계관(1867. 6. 12. ~ 1910. 8. 10.)

유족 홍성기(홍계관의 증손자)




 

홍성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홍계관의 증손자



  홍계관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인 부대’를 이끌며 완산칠봉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철저히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 그의 증손자 홍성기 유족은 이러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용기와 헌신, 그리고 집안이 지켜온 비밀스러운 역사를 회고하며, 선조들의 희생과 정신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가치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먼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녹두꽃』 독자분들께 인사와 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반갑습니다. 저는 홍성기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신 홍계관 어르신의 4대손이자, 그의 후손인 국악인 홍웅표(예명 홍정택)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제4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명고수부 장원을 수상한 이후로, 고수로서 국악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문) 증조부이신 홍계관 선생님은 광대집단 혹은 무부병(巫夫兵)이라 불리는 ‘천민부대’를 이끄셨던 독특한 이력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분이셨는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답) 증조부이신 홍계관 어르신을 이야기할 때, 친형 홍낙관 어르신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 당시 상황을 온전히 설명 드리기 어렵습니다. 두 분은 아버님이신 홍맹철 고조부님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당시 ‘재인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규장각에 소장된 『첩보(牒報)』에 따르면, 홍낙관 어르신은 수접주(首接主)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아버님이신 홍맹철 어르신은 선봉대장, 동생인 홍응관·홍계관 어르신과 사촌동생인 홍한관 어르신은 각기 접주로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홍낙관 어르신이 본래 재인이셨기 때문에 초기에는 창우(倡優, 광대)나 무부(巫夫, 굿판에서 무당을 도와 반주를 담당한 예인)와 같은 예인들이 주축이 되어 부대를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그 세가 커지면서 평민, 선비들까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 부대를 ‘예인 부대’라 부르고 싶습니다. 예인이라는 이유로 천대받던 분들이 동학농민혁명에 나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지향한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예인 부대의 존재와 용기를 떠올릴 때마다 정말 큰 자부심이 듭니다. 그리고 그분들뿐 아니라 수많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고, 또 벅찬 마음이 듭니다.



 

첩보(제공: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 홍계관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신 홍낙관 선생 님, 그리고 아버님이신 홍맹철 선생님에 관한 기 록도 많은데요. 그분들과 함께 홍계관 선생님께 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구 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 기록들을 보면, 홍낙관 어르신과 홍계관 어르신께서 손화중 포에서 크게 활약하셨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홍낙관 어르신이 이끄셨던 예인 부대는 백산에 집결한 이후 황토현 전투, 황룡강 전투, 전주성 전투를 거치며 손화중의 척후병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산칠봉 전투에서 선봉대장이셨던 홍맹철 어르신께서 안타깝게도 전사하셨습니다. 이후 홍낙관 어르신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김덕명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홍낙관 어르신은 말주변이 좋아 살아남으셨고, 홍계관 어르신과 함께 피신하신 걸로 보입니다.



문) 완산칠봉 전투는 가족분들께도 큰 상처로 남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이나 홍계관 선생님의 심정에 대해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답) 제가 어렸을 때, 홍순열 할아버님께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에 홍맹철 어르신에 대한 말씀이 많았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홍맹철 어르신이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고 하시며, 예인 부대의 활약상과 함께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대치하던 중 완산칠봉 전투에서 총에 맞아 전사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칼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설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하튼 당시 홍맹철 어르신이 부상을 입자 적들이 “홍장군을 잡았다”고 외쳐서 우리 동학농민군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때 홍낙관 어르신인지, 홍계관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 중 한 분이 아버님이신 홍맹철 어르신을 안으려 하자, 홍맹철 어르신이 아들을 발로 차며 “후일을 도모하거라”는 말을 남기셨다는 이야기를 홍순열 할아버님께 직접 들었습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이분들의 희생과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양홍씨세계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홍계관 선생님은 운 좋게도 체포를 피하셨습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자세한 내용은 당연히 잘 모릅니다. 홍순열 할아버님께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거의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금기시하셨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신 적이 없고, 다만 완산전투에 대해서만 아주 조심스럽게 언급하셨습니다. 그마저도 늘 손으로 입을 가리시며 “비밀이다”라고 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신 손태두 교수님과 아버님께서 우리 집안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부안 일대의 읍사무소와 면사무소를 직접 돌아다니며 할아버님 함자 ‘홍순열’이라는 이름을 찾아 나섰습니다. 두 곳에서 ‘홍순열’이라는 이름이 확인되었지만 한자가 달랐습니다. 아마 이사를 다니시면서 두 군데에 기록이 남은 것 같은데, 출생연월일이 일치해 같은 인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쓰면서 한자를 틀릴 리가 없잖아요. 당신 자신도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름을 바꿨을까요. 참 안타까웠습니다.






 

홍성각                                                                                                                                                                        홍성기

홍낙관 참여자의 후손                                                                                                                                      홍계관 참여자의 후손



문) 혹시 아직도 집안 내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나요? 그 부분에 대해 경험하신 바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답) 가까운 예로 제 사촌 누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아직까지 동학농민혁명 유족 등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등록 요건이 충족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안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며 끝내 등록을 미루고 계십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가 음악을 했다는 사실과 큰무당이셨던 ‘당골네’와 결혼했다는 집안 내력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예전에는 음악을 하거나 무속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보는 인식이 강했고 실제로도 사회적으로 많은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촌 누님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하시고, 유족 등록을 하면 그런 내력이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을까 두렵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국악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거에 대한 낙인과 수치심이 여전히 그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촌 누님을 보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분들과 그 후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회적 천대와 편견 속에서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과거의 고난은 단순히 역사 속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가족들, 우리 공동체 속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분들의 삶과 정신이 제대로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가문 전체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친구를 신뢰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마도 우리 선조들 역시 이러한 삶의 태도와 가치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억울하고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 자신과 가족, 마을 전체가 함께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한 정치적 이유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신념과 양심이 우리 가문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끈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믿습니다.


문) 선생님 가문에서 국악인이 많이 배출된 것도 타고난 영향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아버님이신 홍웅표 선생님께서는 국악 분야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셨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답) 아버님은 1921년생이십니다. 저를 마흔 후반에 늦둥이로 보셨는데, 그만큼 저를 정말 많이 예뻐해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에 재직하시며 국악 교육과 공연 활동에 힘쓰셨습니다. 그 시절, 일반 대중들도 국악을 더 쉽고 가깝게 접할 수 있도록 애쓰셨고, 국악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국악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전북을 끝까지 지키며 활동하셨다는 점에서, 저는 아버님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문은 예로부터 국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입니다. 국악인이 참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마도 과거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기질과 감성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님이신 홍웅표를 비롯해 홍두환 큰아버님, 아버님의 사촌동생이신 전정민 님, 홍성덕 사촌누님, 조카인 김세미 등 여러 국악인이 집안에서 나왔고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보고 있으면, 예술과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이 단순한 개인의 길이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의 정신이자 유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선생님께서 직접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신청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족 신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답) 홍순열 할아버님께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시긴 했지만 어렸던지라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할아버님께서 늘 손으로 입을 가리시며 ‘비밀’이라 하셨기에, 이 일은 평생 간직해야 할 비밀이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20년 전, 손태두 교수님과 아버님께서 이 일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밝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본격적으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동학농민혁명이 훌륭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손태두 교수님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학술대회에 참석하며, 우리 선조들이 이 대단한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점차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기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내에서도 여전히 동학농민혁명을 터부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홍낙관 어르신의 후손인 홍성각 형님과 힘을 합쳐, 100여 명에 달하는 후손들을 한 분 한 분 직접 찾아가 만나며 주민등록등본과 위임장을 받아 등록 신청을 진행했습니다.




 

2023년 동학농민혁명 유족 등록 통지서 전달식(왼쪽부터 신순철 기념재단 이사장, 홍성기 유족, 주영채 전 유족회장)



문) 마지막 질문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으로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혹은 정부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유족 신청을 하기 전부터 매년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식에 온 집안 사람들을 동원해 참석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유족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기념재단을 방문할 때마다 저는 항상 추모관에 들러 홍낙관, 홍계관 우리 선조분들의 명패를 살펴보고, 또 새롭게 등록된 참여자분들의 명패를 한참 바라봅니다. 이분들의 희생과 수고가 결코 잊히지 않도록 우리 국민들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정부에서도 한층 더 깊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내년에는 이재명 대통령님께서 꼭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식에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선생님, 귀한 말씀 들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으로 유족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대담자: 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최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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