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교단 조직의 체계화와 동학교도의 증가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최시형, 동학교단 조직을 체계화하다
1871년 영해민란의 실패로 동학조직은 사실상 완전히 와해된 상태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최시형은 영해민란 후에 살아남은 몇몇 교도들과 고단한 피난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요 은신지는 강원도 영월 · 정선, 충북 단양 등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태산준령(泰山峻嶺)과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은 영해민란의 여파로 인한 혹독한 관의 지목으로부터 동학교단 조직과 동학교도들을 건져준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험준한 산악지방은 동학 지도자들과 교도들의 피신과 은신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이 지역 주민은 관의 탄압과 지목을 피해 숨어들어 오는 교도들을 감싸주었다. 그리하여 위기에 처해 있던 동학교단은 회생의 방도를 찾을 수 있었다.
1870년대 후기 동학교단은 영월, 정선 등 영서지방에 자리한 비밀포교지를 중심으로 영해민란으로 야기된 교단의 일대 위기를 극복하고 착실히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우선 이 시기에 들어서면 교조의 처형 이래 교도 결속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한 최제우의 유족들이 관에 체포되거나 병으로 사망함으로써 최시형이 자연스럽게 교도들을 결속시키는 핵심적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영해민란을 계기로 많은 교단 지도층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학교단의 지도체제는 최시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72년 겨울 갈래산 적조암 수련 이래 새로이 모여든 영월, 정선, 단양 지방교도들을 중심으로 교도들의 수련활동을 이어나감으로써 최시형은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도교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가미한 동학의 새로운 종교의식을 제정하며, 최제우의 문집을 다시 편찬하고 동학의 기본 경전을 집성하는 등 지도체제 확립과 교단조직의 정비 및 체계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다
동학교단의 기본경전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이다. 「동경대전」은 최제우가 지은 한문체 저작 여러 편을 모아 펴낸 것이며 「용담유사」는 한글체 가사 여러 편을 모아 펴낸 것이다. 두 경전의 간행은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학교단이 영서지방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지방의 유력가문인 강릉 유씨(劉氏), 영월 신씨(辛氏), 강릉 김씨(金氏) 들이 다투어 동학을 받아들이고 경제적 후원을 함으로써 동학 경전 간행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강원도 출신 인물들의 경제적 후원에 힘입은 동학 경전 편찬 작업은 먼저 「동경대전」 간행으로 나타났다. 1880년 5월 강원도 인제 갑둔리(甲遁里) 김현수가(金顯洙家)에 각판소를 설치하고 약 한 달간의 작업을 벌여 「동경대전」 백 권을 간행하였다. 이듬해에는 같은 인제 천동(泉洞) 여규덕가(呂奎德家)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된 경전으로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 축문(祝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용담유사」는 한글로 된 경전으로 용담가, 교훈가, 안심가, 도수사, 권학가, 몽중노소문답가, 도덕가, 흥비가, 검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학교단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함으로써 동학의 사상적 · 이론적 논리를 체계화하였다. 이는 동학이 우리의 자생적인 종교 또는 사상으로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동학교도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동학교도의 급격한 증가
1880년대 초반 동학교단은 1870년대 후반에 이룩한 최시형 중심의 단일지도체제 확립, 새로운 종교의례의 확립,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위한 정기 수련의 시행, 순회 포교활동의 활성화, 경전의 간행 등을 기반으로 강원도 영서지방의 산악지대를 넘어 청주, 충주, 보은, 공주, 목천, 익산, 부안 등 호서 · 호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할 당시에 보은, 남원 등지에 동학이 포교되었던 호서 · 호남지방에도 1880년대에 들어와 교세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최시형의 지하포교지가 1880년대에 들어와 호서 · 호남의 평야지대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증거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공주 마곡사의 가섭암(迦葉庵)과 익산 미륵산 사자암(獅子庵) 등이 호서 · 호남 지방 포교의 전진기지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동학교단의 평야지대 진출은 동학교단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이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동학교단 내의 커다란 변화는 청주의 손병희(孫秉熙)·손천민(孫天民)·임규호(任奎鎬)·권병덕(權秉悳), 충주의 서병학(徐丙鶴), 보은의 황하일(黃河一), 예산의 박인호(朴寅浩), 공주의 윤상오(尹相五), 목천의 김은경(金殷卿), 익산의 박치경(朴致敬), 수원의 서인주(徐仁周) 등 장차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활약할 인물들이 대거 입교하게 된다는 점이다. 특히 서인주와 서병학을 비롯한 호서 · 호남 출신 인물들이 동학교단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1880년대는 고종의 급속한 개화정책 추진을 둘러싸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이 일어나 민중들 사이에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배외의식이 점차 강하게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 탓에 봉건지배층과 지방수령들의 동학에 대한 금압정책이 느슨해졌으며, 민중들은 오히려 불안과 위기의식의 해소를 위해 동학과 같은 새로운 가르침을 앞 다투어 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처럼 1880년대 후반부터 호서 · 호남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포교되기 시작한 동학은 1890년대 초기에 이르면 비약적인 교세증가를 이루게 된다. 1890년대 초기 교세의 비약적 증가와 함께 대두한 동학조직을 둘러싸고 일어난 현상들은 교단지도부로 하여금 교도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포교방식을 채택하게 하였다. 즉 봉건지배층과 지방수령들의 탄압과 수탈을 피해 그간 수동적으로 전개해온 지하포교방식을 청산하고 포교의 공인 획득을 위한 교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가렴주구의 금지를 요구하는 공개적이며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1892년, 1893년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 참고문헌
박맹수, 『1894년 농민전쟁연구3』,「동학의 교단조직과 지도체제의 변천」, 역사비평사,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