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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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 34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도열의 증손자 최낙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최도열의 증손자 최낙인


문) 이번 호의 유족 인터뷰에는 참여자 최도열의 증손자 최낙인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선생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답) 반갑습니다. 저는 풍암리 자작고개 동학농민군 전투에서 전사한 참여자 최 도자 열자(崔道烈)의 증손자 최낙인입니다. 이곳 홍천 서석에서 나고자란 홍천 토박이로 현재는 춘천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문)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중심의 낡은 봉건체제를 개혁하여 만민이 평등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고자 일어선 반봉건 민주항쟁입니다. 나아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반일 민족항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은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어왔습니다. 따라서 참여자 후손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직접 겪었거나 부모님 혹은 선대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저는 약 400년 전 홍천에 정착한 전주최씨 참의공파 25대 후손입니다. 조상님들이 큰 벼슬을 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풍암리 지역에서는 풍족한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께 전해들은 바로는 “풍암리의 논과 밭 대부분이 우리 것으로, 우리 땅을 밟지 않고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던 재산을 하루 아침에 다 빼앗겨버렸고, 일제 강점기 때까지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서 동학의 동자도 말 못하고 쥐 죽은 듯이 목숨을 연명해왔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재산을 다시 찾으려고 남보다 세~네 배 열심히 일을 하신 결과 예전에 빼앗겼던 농토 대부분을 되찾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력 10월 23일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에는 밤 10시가 넘으면 대문을 잠그고 방문에 홑이불 같은 것을 씌워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해서 12시 전에 남모르게 제사를 서둘러서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10월 23일 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은 “東學을 신봉하는 집으로 역적의 집안이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왜냐면 풍암리 자작고개전투 때 마을의 많은 분들이 같은 날 돌아가셔서 그날 제사드리는 집안은 동학혁명에 가담한 집안이라고 금방 표가 나기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 들어와 전기불이 들어오면서 없어졌지요. 풍암리 자작고개에 위령탑이 세워진 것은 1977년이었어요. 그 무렵 아버지께서 장날이면 집에 일찍 돌아오시지 않곤 해서 제가 아버지를 찾으러 자작고개 쪽으로 나갔다가 약주를 드시고는 위령탑 앞 성황당 안에 들어가서 한없이 울고계신 것을 몇 번 보았어요.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언제 처음 알았는지요? 그리고 그런 얘기를 누구로부터 들었는지요?


답) 80년대 초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대학생 시절 주말에 집에 왔는데 낯선 분이 아버지와 방송 녹화를 위해 대담을 하고 있었어요. 그 낯선 분이 바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이었어요. 얼마 뒤 아버지의 대담 내용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는데 그 프로그램 제목이 “자작고개와 동학난”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TV방송을 통해 우리 가문이 동학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눈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몇 번 이와 관련한 사실을 여쭤보았으나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한숨을 쉬시면서 먼 산만 바라보실 뿐 그 어떤 얘기도 해주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지 못한 채 1992년도에 작고(作故)하셨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증조부님의 나이나 집안의 형편 등 이런 저런 내용들을 알고 계시는 게 있는지요?


답) 아버지 살아생전에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신 몇몇 교수님들이 자작고개전투에 대하여 면담하거나 녹취한 내용 이외에는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없어 자세한 내역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후일 어머니를 통해서 전해들은 애기와 아버지께서 얘기하신 녹취록을 종합해보면 갑오년 10월 당시 저의 고조할아버지이신 최병헌(秉憲, 41세)은 서석면에서 지금의 면장격의 일을 하셨다 하며, 전주최씨 집안의 영향력이 있는 수장이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들 최도열(道烈, 25세) 즉 저의 증조할아버지는 독자(獨子)였는데 25세 때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 자작고개전투 때 사망하신 이후 특별한 얘기는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원도 지역에서도 홍천, 영월, 평창, 정선, 강릉 등지에서 많은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투가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전투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투에 대해 알고 계시는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갑오년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 무단점령, 친일내각 수립, 청일전쟁 등으로 도발 하자 삼남의 동학농민군이 반일항전의 기치를 들고 봉기를 하였지요. 그래서 강원도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반일항전에 합류하고자 세력을 규합하여 보은 장내리로 나가려고 이동하던 중 지평현의 현감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이때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대장은 차기석(車基錫) 접주였다고 해요.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13일 물걸리 동창을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우고 곡식을 빼앗아 군량미를 확보한 후 교통의 요충지인 풍암리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동학농민군 숫자가 1천여 명으로, 진등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동학농민군을 토벌을 위해 홍천에서 지평현감 맹영재, 원주에서 횡성현감 유동근이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이 진격해왔다고 합니다. 이때 횡성 쪽의 유동근이 이끄는 관군은 먼드래재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나 맹영재 민보군이 풍암리까지 진격해왔는데 그날이 10월 22일인 것으로 「갑오실기」, 「동비토록」, 「임영토비소록」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제 증조부께서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셨는데, 맹영재가 이끄는 토벌대가 자행한 동학농민군에 대한 학살은 23일 싸움에서 뿐만 아니라 토벌대가 풍암리를 철수할 때까지 3~4일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맹영재가 올린 보고서를 보면 “총으로 쏘아 죽인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홍천 서석 일대는 사람의 자취가 영원히 끊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군과 그들의 일가친척, 동네주민 등이 800명 또는 1천여 명에 이를 것이라는 증언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문) 선생님께서 특별법 제정 이후 증조부님을 참여자로 등록하고자 작성하여 제출한 문서에 “증조부께서 1894년 10월 홍천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전투에 참전하여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갑오년 10월 13일 내촌면 물걸리 동창을 습격하였던 차기석의 동학군이 각처에서 모여드는 동학농민군들과 합세하기 위하여 풍암리로 이동하여 10여일간 진등에 진을 치고 머물면서 봉기를 준비하자 고조할아버지이신 최병헌(秉憲, 1854년생, 41세)은 그의 아들인 최도열(道烈, 1870년생, 25세)과 함께 각 처에서 몰려드는 수백여 명의 동학농민군들에게 소를 잡아 네 귀퉁이를 말뚝에 묶어 놓고 소가죽 위에 쌀과 물을 붓고 가죽 밑에 불을 지펴 밥을 해 농민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또 동학농민군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무기가 부족하자 집에 있던 낫, 도끼, 쇠스랑 등의 농기구를 농민군에게 제공하고, 버드나무로 총을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처럼 위장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해서 진등에 흙으로 보루를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맹영재의 민보군과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맹영재의 민보군은 한 낮부터 저물 때까지 자작고개 아래에서 진등을 포위한 채 조총을 마구 쏘았고, 퇴각하지 못한 동학농민군들이 그 자리에서 쏟아지는 조총 탄환에 맞아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수백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것은 농민군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우면 민보군의 총에서 총알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증조부께서도 총에 맞아 진등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난리를 진압한 민보군은 인근 마을을 수색하여 마을주민들이 도망가는 동학농민군을 숨겨주거나 원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학교도이건 아니건 간에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조총과 창으로 학살했으며, 이때 자작고개와 인접한 풍암리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최씨, 김씨, 민씨, 엄씨, 사씨, 고씨, 황씨 등 30여 호의 남자뿐만 아니라 미처 피난하지 못한 부녀자 어린아이까지 진압군에게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족들이 장광이나 뒷간 등에 숨었다가 동네 뒷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는데, 증조할머니는 너무 급한 나머지 돌잡이 아들을 광(곳간)에 있는 큰 쌀독(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닫은 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속으로 피난을 가셨답니다. 이틀 후 민보군들이 철수하자 집에 돌아와서 곳간 항아리를 열어보니 그때까지 돌잡이 아들이 포대기로 쌓인 채 잠을 자고 있더랍니다. 그렇게 살아남으신 분이 최규백(圭伯, 1893~1943) 저의 할아버지이십니다.



문) 증조부의 시신은 거두셨는지,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답) 증조할아버지의 시신이 어떻게 수습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은 바가 없습니다. 증조부님의 묘소는 풍암리를 감싼 채 자작고개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아미산 중턱 선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공문서나 족보 자료집 서책 등이 있을까요? 기록된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전주최씨 참의공파 족보에 증조부님께서 1870년(庚午年)에 태어나셨고 갑오년 10월 23일 풍암리에서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25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증조부에 대한 이외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문) 증조부께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용하셨던 물건이나 유품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있을까요?


답) 1972년도에 집을 새로 짓기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옛집을 헐 때 천장과 지붕에서 당시 사용했던 화승총으로 보이는 쇠뭉치와 여러 권의 고서(古書)가 나왔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부모님께서는 그 유물을 남들이 볼까 걱정이 되어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문) 지난 연말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개정되어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우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에서 참여자와 유족 등록업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주변에 많이 홍보해주셨으면 합니다. 혹여, 선생님께 등록을 문의하거나 등록을 희망하는 사람은 없는지요?


답) 풍암리 자작고개 동학농민군 전투에 참여했던 분들이 참여자로 등록한 것을 파악해보니 일곱 분이 등록되었습니다. 현재 풍암리에 거주하는 참여자 후손 몇 가족이 더 계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참여자와 유족의 등록업무가 재개되었으니 이분들에게 알려서 등록을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독려하겠습니다. 나아가 서석면동학농민혁명추모사업회와 협조하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더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문) 끝으로, 빠뜨린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지난 10월 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저희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자작고개전투지 등 홍천군 일원에서 제124주년 동학농민혁명기념대회를 개최해주신 것에 대해 기념재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재단에서 강원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지역민들이 관심을 갖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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