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야?”
원광여자고등학교 2학년 3반
조주원
"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야?" 현장체험학습 장소가 동학농민혁명유적지로 정해졌을 때 불쑥 나왔던 말이었다. 지루한 현장체험학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 유적지를 답사하다 보니 지루함보다는 선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답사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만석보터였다. 만석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 전북 정읍과 김제의 경계선이 되는 정읍천과 동진강이 합류하는 지점 물을 가두는 둑이다. 이곳의 물로 농사를 지으면 풍년이 든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잘 사용되다가 조병갑의 횡포(많은 보 설치 및 수세 걷음)로 농민들은 만석보를 헐어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갑오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운 유지비만이 남아 넓은 평야와 조감도로 예전 모습을 예측해볼 수 있었다. 유채꽃이 핀다는 5월에 다시 한번 더 찾아오고 싶다.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인 이곳에서 선조들의 혁명을 상상해보며 양성우 시인이 쓴 '만석보' 시비를 읽어보고 '전봉준 선생 고택'으로 향했다.
남향의 이 초가집은 다른 남부지방의 민가와 구조상 차이가 있었다. 전봉준 장군은 이곳에서 농사일과 서당 훈장 일을 하다가 군수의 횡포를 듣고 농민군을 이끌었을 것이다.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토대로 전봉준 장군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전봉준이 사용했다는 우물 안에 쓰레기가 있는 것을 보고 관광객의 부도덕함이 한 문화재의 격을 떨어뜨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고부 관아 터'도 찾아갔다. 일제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고부 관아를 허물고 고부초등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바삐 움직였을 고부 관아 대신 조용한 운동장을 보고 있으니 공허함이 느껴진다. 한쪽 구석의 초석과 기단석만이 그 자리를 암시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조선시대 마을을 재현한 송참봉 조선동네에서 점심을 먹을 때는 실제 조선시대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동글동글한 팻말의 글씨체가 사랑스럽고 정겨웠다. 널뛰기와 그네, 초가집, 지게, 가축.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장독대는 옹기종기 모여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었고, 호박들은 주렁주렁 지붕 위에 달려 있었다. 헤어질 때 손을 흔들어주시던 이장님의 따뜻한 마음이 와닿았다. 평상 위에서 느낀 여유로움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었다. 교육관에서 홍보영상을 관람 후 퀴즈 대회에서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전시관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고목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현장율 지켜본 고목의 위엄은 우리를 긴장시켰다. 전시된 사발통문의 6~7시 방향에서 전봉준 장군의 이름을 찾았다. 관군들에게 잡혀 수갑을 단 채로 압송당하는 농민군의 애처로운 표정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글로만 접했던 역사를 갑정 이입해서 느낄 수 있었다. 애매하던 '동학농민혁명'도 정의내릴 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의 애국애족을 느낄 수 있었던 이번 답사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동학에 토대를 둔 농민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그 정신은 3·1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우리 선조들의 굳은 의지가 존경스럽다. 이제 우리가 선조들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바른 역사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