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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겨울 6호
영해민란(寧海民亂)과 이필제(李弼濟)

  영해민란(寧海民亂)과 이필제(李弼濟)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영해민란이 일어나다


  1871년 3월 10일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날을 기하여 영해지방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 18개 지방민이 참가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한 고을 단위를 뛰어넘어 여러 고을의 민중들이 가담한 민란이 일어나기는 1811년 홍경래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월 최시형과 이필제(李弼濟}를 비롯하여 300여 명의 가담자들이 1871년 3월 8일부터 10일 경상도 영해 형제봉 병풍바위 아래 박영관의 집으로 집결하였다. 이들은 3월 10일 황혼녁에 형제봉에 올라 천제(天祭)를 지내고 준비된 유건(儒巾)과 청주의(靑周衣)를 입고 죽창과 조총으로 무장하였다.


  이중 동학교도는 청(靑), 일반평민은 홍(紅) 등의 군호(軍號)를 정하고 밤 9시께 영해부(寧海府)로 향하였다. 1대는 군기고를 격파하여 조총을 탈취하였고 1대는 동헌으로 진격하여 부사 이정(李政)을 찾았다. 포교들이 도망가버리자 영해부는 순식간에 이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 봉기 민중들은 영해부민들의 호응을 기대하면서 11일 오후까지 영해부를 장악했으나 상황은 그들에게 불리하였다. 봉기민중들은 사태의 추이에 대하여 불안해하였으며 영덕으로 진격하자는 이필제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이필제와 해월 최시형 등 주모자들은 장차 도래할 각 지방군의 진압을 피해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필제 등은 탈취한 돈 140량을 5개 동민의 대표를 불러 나누어 주기도 하고 일반백성들에 대해서는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방을 붙이는 등 부민들의 효유에 애를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에 봉기민중들은 11일 오후 영해부를 빠져나와 해월 최시형의 은거지가 있던 일월산을 향하여 피신길에 올랐다. 상황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14일 일월산에 도착한 인원은 해월 최시형, 이필제, 강사원 등 불과 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도 다음날 15일 관군과 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부분 체포되거나 죽고 해월 최시형, 이필제, 강사원 3인만 단양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영해민란을 일으킨 지 5일만에 사실상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이다. 



  끊임없이 변란을 도모한 이필제 


  영해민란을 계획하고 주도한 사람은 바로 이필제이다. 이필제는 1825년(순조 25, 을유)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860년경에 진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본래 이름은 근수(根洙)였으나 처음에는 필제(弼濟) 로 바꾸었고, 그 후에는 이홍(李弘)으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이필제는 끊임없이 변란을 도모하였다. 


  1869년 4월 충청도 진천에서 변란을 모의했으나 참여한 사람이 발고함으로서 실패하게 되는데 이을 '진천작변(鎭川作變)'이라 한다. 1869년 12원에는 '남해거사(南海擧事)'를 준비했으나 자금 부족과 참여한 사람들의 비협조로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또 1870년 진주 부근의 덕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2월 28일 진주읍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24일 진주 유학 조용주(趙鏞周) 형제 등이 진주 진영에 이 사실을 투서함으로서 중도에 실패하였다. 이를 '진주작변(晉州作變)'이라 한다. 


  '진주작변' 실패 후 이필제는 다시 경상도 영해로 가서 해월 최시형과 함께 '영해민란'을 일으켰다. 영해민란은 이필제의 거사 중 유일하게 성공한 거사였지만 닷새만에 진압되었고 다시 피신하는 몸이 되었다. 


  단양에서 해월 최시형 일행과 헤어진 이필제는 다시 단양을 중심으로 정감록을 이용하여 난을 준비하고 있던 정기현 등과 공모하여 1871년 8월 2일 조령관(鳥嶺關) 내 초곡(草谷)에서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 이필제는 조령에서 체포되어 경상감영에서 문초를 받은 후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1871년 12월 24일 군기시(軍器侍) 앞길에서 모반대역죄로 능지처참됨으로서 파란만장한 최후를 마쳤다. 


  이필제는 일반적으로 몰락양반이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고 독서를 통해 문장에 대한 재능을 키웠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부터 북벌(北伐)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그는 36세 때 허선(許璿)이라는 인물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허선은 정감록에 심취해 있던 인물로서 정감록의 피난설에 따라 풍기에 은둔해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필제는 허선의 영향으로 정감록을 통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북벌론에 대하여 일종의 메시아적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허선과는 달리 소극적으로 피난·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란을 모의하였다. 


  이필제는 북벌론과 정감록적 사유방식을 결합함으로서 여타 지역에서 정감록적 사유방식에 기반하여 민란을 준비하던 세력들과 충돌 없이 결합할 수 있었다. 즉 이필제는 중국을 점령하고 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해당 지역 민란 준비세력에게 주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함으로서 서로 연합할 수 있었다. 



  영해민란, 교조신원운동으로 발전하다


  영해민란의 가장 큰 특징은 끊임없이 변란을 도모한 이필제와 영해지방의 새로운 신분상승세력인 신향(新鄕) 세력, 그리고 1864년 3월 교조 최제우의 순교 이래 경상도 북부지방에서 교세를 회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던 동학지도자 해월 최시형과의 결합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이필제와 신향, 그리고 동학교단의 성공적 결합이 결국 영해민란 이전에 이필제가 도모했던 작변들의 실패를 극복하고 대규모 민중을 동원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이며, 일시적으로나마 영해부를 점령하고 부사를 처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필제는 어떻게 하여 신향세력과 동학교단의 지도자 해월 최시형과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영해지방의 신향들은 오래전 동학의 평등한 교리에 호응하여 다투어 교도가 되었다가 이른바 영해지방 의 보수양반세력들인 구향세력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은 바 있었다. 이들은 동학교조의 신원이라는 명분과 구향(舊鄕)들에 대한 징치를 위해 이필제와 손을 잡았다.


  또한 초기 동학교인들은 최제우를 진인(眞人)이나 이인(異人), 즉 민중 자신들의 현실적 고통과 염원을 일거에 해소하거나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인물로 이해하였고 동학사상을 자신들의 고통과 염원을 대변한 사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이필제는 자기야말로 최제우와 같은 진인임을 널리 퍼트려 일반 민중 등을 결집하게 하였고, 한편으로 '최제우의 제자'임을 내세웠다. 또 교조 수운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야 한다는 교도들의 염원을 대변하여 최시형을 참여시켰던 것이다.


  영해민란의 실패로 이에 참여한 동학교단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영해민란에서 수운 최제우의 신원 문제가 제기됨으로서 동학교단의 문제를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 그리고 조선 전체의 문제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대규모 민중혁명으로 가는 길목에서 영해민란이 하나의 커다란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연갑수, 「이필제 연구」, 『동학학보』 제6호, 2003 

  김은정·문경민·김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 나남출판, 1999 

  박맹수, 『최시형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5 

  장영민, 「1871년 寧海 東學亂」, 『한국학보』,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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