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순교터를 다녀와서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전상욱
「 피고가 지시하고 화응한 일은 없지만 그 변란이 일어나게 된 근원을 따져보면 피고가 주문과 부적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킨 데 있습니다.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일체 좌도(左道)로써 바른 도를 어지럽히는 술책과 혹은 도상(圖像)을 숨겨놓고 향을 피워 사람들을 모으고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거짓으로 착한 일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에 대한 형률에 비추어 교형에 처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최시형을 원래 의율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35년(1898) 7월 18일
서울시내에는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전적지나 그 본연의 모습이 보전되는 유적지를 찾아보긴 힘들지만 지금의 광화문 일대와 종로에는(옛 평리원, 육군법원, 광희문) 동학의 제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고된 수형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건물 새단장 공사중인 옛 단성사 극장 건물 옆 인도에 최시형이 순교한 터가 있다.
지금은 건물 새단장 공사로 주변이 더욱 번잡하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길목에, 그것도 하필이면 종로3가역의 지하철 입구 쪽에 자리잡고 있는 터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못하는 이 단출한 석비는 1898년 6월 2일 정오 해월이 서소문 감옥에서 옮겨져 그날 오후로 바로 처형된 터임을 오롯이 말해주고 있다.
경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머슴살이, 제지소 직공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다가 당시 경주 용담에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스승이자 동학의 창시자인 1대 교주 수운 최제우를 만나게 된다. 이후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도통을 승계받았다. 동학 2대 교주가 되었지만 앞서 기술한 혹세무민 등의 죄목으로 곧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고 이후 36년간의 기나긴 도피생활을 이어간다. 자신의 후반생 거의 대부분을 관의 추적과 수배 속에 지내는 와중에서도 해월은 동학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와 같은 경전을 간행하는 등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로 동학의 교세는 전국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가기에 이르지만, 최시형은 1898년 끝내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 서소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여러 차례의 재판을 거친 뒤 결국 교형에 처해진다.
1893년에는 40여 명의 대표와 신도들이 엎디어 일제히 통곡을 하면서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하기도 했던 광화문과도 지척인 이곳에서 최시형은 먼저 그의 스승 최제우도 지났던, 고난으로 점철된 수행과 포교의 여정에 겸허히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시신은 형 집행 사흘 뒤 광희문 밖에 버려져 가매장된 것을 이종훈 등이 수습하여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 아래 볕 좋은 능선에 묻었다. 1907년에는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알려진 바대로 동학의 인간평등관은 반상이 엄격히 구분되던 조선왕조의 기존 사상질서와는 확연히 단절되는 혁명적 사상으로,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민중들로부터는 커다란 호응을 얻었지만, 창도자 최제우를 비롯해서 2대 교주 최시형까지 감형을 당하는 가혹한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민초들의 삶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동학사상을 널리 펼치려 노력하여 창시자의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넘치게 하였던 해월은 이를 통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근대 최대의 민중운동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 3·1운동 등 독립운동과 근대화의 사상적 토대와 조직을 구현해 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