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開闢(개벽) 서구자본주의 근대문명 그 너머를 향하여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
문병학
동학농민혁명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명제에 매우 부합한 사건이다. 사건 당시에도 큰 역사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후에도 그 의미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역사학 이외에도 정치·경제·사회 등 각각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한국 현대시단서도 1894년 이후 지금까지 아래 표와 같이 이 사건을 모티프로 265편이라는 시작품 창작·발표를 통해 그 역사적 의미를 추구해 왔다.
아래 표를 통해 1970년대까지 창작·발표된 시작품은 19편뿐이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246편이 1980~90년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연대별로 극심하게 부침을 보이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 전개과정에서 자행된 정치적인 억압과 통제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구분  | 
소계  | 
1940  | 
1950  | 
1960  | 
1970  | 
1980  | 
1990  | 
|
시  | 
장편  | 
9  | 
0  | 
0  | 
1  | 
0  | 
5  | 
3  | 
단편  | 
256  | 
1  | 
0  | 
7  | 
10  | 
175  | 
63  | 
|
총계  | 
265  | 
1  | 
0  | 
8  | 
10  | 
180  | 
66  | 
|
갑오년 이후 약 70여 년간 창작된 시는 1947년 『연간 조선시집』에 발표된 조운의 「고부 두승산」이 유일하다. 이는 농민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식민지시기, 해방 후 세계사적 차원에서의 동서냉전체제구축, 외세에 의한 신탁통치, 국내 정치세력간 극심한 좌우대립,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등으로 점철된 한국근·현대사의 정치적 혼돈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최초의 시 「고부 두승산」은 혁명의 주체를 '농민대중'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로서 3·1운동 이후 국내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기초한 역사인식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렇듯 오랫동안 시 창작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5·16군사정권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한국시단 두 번째 시 신석정의 「갑오동학혁명의 노래」가 발표되었다. 이 시는 정읍 황토현에 건립된 기념탑 제막식 나흘 전(1963. 9. 29.) 전북지역 일간지를 통해 발표되었는데,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권력자의 지방 방문에 따른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이루어진 관제적 성격의 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선거 직전에 제막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민정이양'하겠다던 대국민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호남지역 표를 의식, 건립을 승인·지시하여 이루어졌다. 4·19혁명 이후 역사학자 김상기·이선근 등이 갑오동학혁명기님사업협회(1962, 서울)를 창립했고. 전북지역 인사들이 협회에 기념탑 건립을 건의하였다. 협회는 이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측에 건의하여 건립승인을 받은 후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일을 추진했다. 이렇듯 기념탑을 건립하는그 밑바탕에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음은 공화당이 재원의 일부를 지원한 점, 착공 27일 만에 급조하여 그 제막식을 대통령 선거 유세장으로 활용한 점, 제막식에 당시 대통령 후보로는 유일하게 박정희 후보가 연설을 했다는 점 등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한편, 4·19혁명을 계기로 한국사회에 강제되던 반공이념의 균열이 시작되면서 억눌렸던 민족민주의식이 표출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이 이어져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반외세적 관점에서 서구자본주의 근대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과 단편시 「껍데기는 가라」 등이 발표되있다. 그 맥이 1970년대 반독재운동으로 이어져 김관식, 정렬, 황동규, 문병란 등의 시 10편이 창작·발표되었는데, 이들 작품 대부분이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출판·판매금지조치 당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민족민주운동이 급격하게 성장, 동학농민혁명이 지닌 변혁이데올로기로서의 상징성이 현재화하면서 246편이라는 시작품이 폭발적으로 창작·발표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1980년 이후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작품 창작·발표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근대 이후'를 자처했으며 또 그렇게 인식되기도 했던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서구자본주의 근대문명의 폐해가 극심해지면서 인류사에 새로운 문명적 대안이 절실하게 요청된 것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근대를 극복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자본주의 근대 문명의 세계화 과정, 즉 제국주의 팽창에 따른 모순이 충돌하여 빚어진 이 사건을 21세기 현재의 시대상황과 그 요청에 부합하게 재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신동엽 시인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 영원의 하늘을 보았다."(서사시 금강, 서화·2)라고 노래했다. 척양척왜! 보국안민! 서구 자본주의 근대문명 그 너머를 추구했던 갑오선열들의 혼이 올곧게 되살아나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되는 참된 개벽의 그날이, 영원의 하늘이 우리 앞에 활짝 펼쳐지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