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의 순도(殉道)와 2대 교조(敎祖) 최시형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사상적 토대와 조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동학의 교조(敎祖)인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와 동학의 창도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최제우의 동학 포교
최제우는 1861년부터 동학을 본격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많은 이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6개월 동안에 약 3천여 명의 사람들이 그로부터 도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첫 포교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를 시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학을 천주교=서학의 일종인 사교라고 모함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모함과 관현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1861년 11월 피신의 길에 올랐다. 그는 여러 지역을 거쳐 전라도 남원의 은적암에 들어가서 1862년 3월까지 은신하였다가 돌아와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최제우가 돌아와 포교를 할 때 각지에서 교도 수가 급속히 증가하자, 1862년 11월 최경상(시형)이 최제우에게 각지에서 접주를 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최제우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교도들을 관리하는 조직으로서 접(接)을 설치하고 경상도 지방의 13개 군현 단위로 접주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접 조직은 동학의 기본적인 조직의 단위가 되었다. 최제우가 다시 경주로 돌아오자 경주감영은 사학을 퍼뜨려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죄목으로 1862년 9월에 그를 체포하였다. 다행히도 수백 명의 교도들이 경주 관청에 몰려가 집단항의를 했기 때문에 이내 석방하였다.
형장에서 뿌린 동학농민혁명의 씨앗
하지만 조선정부에서는 동학의 급속한 성장에 큰 위협을 느끼고, 1863년 1월 관리를 경주에 파견하여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처음에는 최제우를 서울로 데려다 처형할 계획이었다가 계획을 바꾸어 대구감영에 투옥시켰다. 대구감영은 1864년 3월 10일 최제우를 참형에 처하였다. 자신이 창도하였던 동학을 위하여 최제우 본인이 순도한 순간이었다. 최제우의 동학 창도는 당시까지 유학이나 불교 등 외국의 사상을 받아들여 우리에 처지에 맞춰 활용한 것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사상체계를 완성한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최시형, 동학의 2대 교조가 되다
최제우의 순도 후에 동학은 2대 교조 최시형이 이끌었다. 최시형은 경주 이북지방 포교활동의 공으로 1863년 7월경 최제우로부터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도하기 전 경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최시형은 1827년 3월 27일 경주부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날품팔이나 머슴살이로 생계를 도모하였다. 불우한 시절을 보내던 최시형은 동학에 입도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는 1861년 6월경으로 그의 나이가 35세였으며 최제우가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을 때였다. 최시형은 스승을 위하는 마음이나 동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려는 자세가 대단하여 조직 내부에서 후일 최제우의 도통을 이어받을 인물로 평가받았다. 1863년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어 다음해 3월 처형되자 최제우 생존시 반공개적으로 이루어지던 포교활동이 사라지고 지하 포교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교세의 기반과 지도체제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즉 동학에 입도한 이래 간절한 정성으로 수운을 받들며 생활해 온 최시형이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최시형의 동학 교단 재건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본부라 할 수 있는 경주 용담과 그 일대의 제자들이 관의 지속적인 탄압을 피해 북부 산악지대로 피신하자 그동안 최제우가 중심이 된 경주 지역의 교세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교세의 기반은 관 탄압의 손길이 미치기 힘든 경주 북부의 산악지대로 옮겨지게 되어 자연히 북부지방과 연고가 많은 최시형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최제우의 죽음이 가져온 위기상황에서 사실상 도통계승자가 된 최시형은 관의 지목을 피하여 영양 일월산 용화동 골짜기로 깊숙이 은신하여 흔들리는 교단의 재건에 온 힘을 다하였다.
일월산 용화동은 1860년대 후반 동학교단의 주요 비밀포교지임과 동시에 1864년부터 1898년까지 40여년 간에 걸치는 최시형의 도망자로서 삶이 시작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860년대 후반 내내 이곳 용화동에 은신하고 있던 최시형은 계를 조직하여 동학교단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매년 두 번의 제사을 정례화하여 교단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최시형의 노력으로 동학교단은 재건될 수 있었으며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조직적인 기반이 될 수 있었다.
▲ 참고문헌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인전쟁연구』, 일조각, 1996
김은정·문경인·감원용, 『동학농민혁명 100년,.나남출판,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