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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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열기
2019년 봄 35호
충남 공주지역 유적지를 찾아서

충남 공주지역 유적지를 찾아서



문병학 | 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동학농민혁명과 공주(公州)•1


  1894년 당시 충청감영 소재지였던 공주(公州)는 동학농민혁명 이태 전인 1892년 동학교단의 공주취회(公州聚會)가 열렸던 장소이다.


  1892년 동학교도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동학교도에 대한 관의 탄압도 높아졌다. 이에 종교적 지향성을 강하게 보이던 동학교단 내부에서 관의 탄압을 대중적인 정치활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고, 마침내 10월 20일경(양력 12. 8.) 서인주·서병학 등이 중심이 되어 공주에서 대중적인 정치집회를 열리게 되었다. ‘공주취회’로 불리는 이 사건은 충청도 관하 지방관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불법적인 수탈행위 금지 등을 요구한 것으로 종교적 지향성이 강한 동학교단 내에 현실적인 문제를 대중적인 정치집회를 통해 해결하려는 변혁지향세력의 움직임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동학교단에서는 1893년 11월 2일(양력 12. 20.) 보다 확대된 삼례집회를 개최하였고,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와 외국공사관 문 앞에 척왜양(斥倭洋) 벽보 사건 그리고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집회와 전라도 금구·원평집회로 이어졌다.



공주집회 터



공주집회 터(옛 충청감영, 現 공주사대부고)                                                     복원된 충청감영의 선화당(공주박물관 앞)


• 충청남도 공주시 반죽동 197, 240, 241 일대


  이곳은 1892년 10월 동학교단에서 주도한 공주집회가 열렸던 장소이다. 당시 충청감영 자리였던 이곳에는 현재 공주사대부고가 들어서 있다.


  18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동학교단의 교세가 삼남지방 전역으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조선정부에서 금지시킨 동학의 세력 확대는 각급 기관의 동학교도 탄압의 가중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에 동학교도들이 재산을 몰수당한 채 거리로 쫓겨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속에서 그동안 종교적 지향성을 강하게 보였던 동학교단 내부에서 교도들에 대한 관의 탄압에 대중적인 정치활동으로 맞서자는 요구가 높아졌고, 마침내 10월 20일(양력 12. 8.) 공주에서 동학교단의 첫 번째 대중적인 정치집회인 공주취회(公州聚會)가 열리게 되었다.



견준봉과 두리봉



주미동에서 바라본 견준봉(정면)과 두리봉(왼쪽)


• 충청남도 공주시 주미동 산 46, 산 53


  우금티전투의 최대 격전지는 우금티와 견준봉(234m) 사이였다. 견준봉은 옛 사람들이 ‘개좆배기’, ‘가죽배기’로 불린, 우금티 마루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 중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두리봉(192m) 또는 정주봉은 견준봉으로부터 남쪽으로 800여m 지점에 솟아난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우금티전투 당시 이곳에 동학농민군 최전방 지휘부가 있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과 공주(公州)•2


  충청도 공주는 1894년 11월 8일(양력 12. 5.)과 9일(양력 12. 6.)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전투였던 우금티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고장이다.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무장에서 기포하여 백산에서 대오를 확대한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전투·황룡전투에서 관군과 경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전라도 수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조선정부는 건국자의 본향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조선정부 조세의 절반가량을 거둬들이던 전주성 함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전라감영이 점령된 것은 조선 건국 이래 ‘반란군’에 의해 감영이 점령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긴급 대신회의를 열어 청나라에 군대 지원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189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텐진조약 등을 빌미삼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처럼 조선을 둘러싼 국내외적 정치정세가 요동치는 속에서 동학농민군은 조선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워주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일본군은 조선정부의 철병 요구를 무시한 채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하여 친일내각을 수립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등 폭거를 자행하였다. 급기야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축출을 전면에 내걸고 1894년 9월 10일경(양력 10. 8.) 전라도 삼례에서 제2차 봉기를 단행하였다. 북상(北上)하던 동학농민군은 10월 12일경(양력 11. 9.) 논산에서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농민군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북접 동학농민군과 연합하여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우금티 등지에서 일본군과 관군 등의 연합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근대적인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극복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남월(南月) 전투지



남월 전투지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목동리 29-1, 29-8, 산 1-1 일대


  남월전투는 공주성을 둘러싸고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 관군 등의 연합부대가 벌인 전투 중에서 맨 처음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봉준 장군은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을 점령한 후 휘하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이인 방향으로, 또 한 부대는 효포 방향으로 진격시켰다.


  이 무렵 일본군 소위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휘하 일본군 50여명과 관군 측의 충청감영 참모관 구완희 휘하 감영군 4개 분대, 서산군수 겸 경리청 영관 성하영 휘하 경리청 1소대 등이 이인 쪽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구완희 휘하 감영군이 구절산 남쪽 남월촌(南月村)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인전투지(취병산/이인역 터)



이인역 터(現 이인초등학교)


• (취병산)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 286일대

• (이인역 터)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 126일대


  취병산과 이인역 일대는 우금티전투에 앞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 등의 연합부대가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인역의 위치는 현재의 이인초등학교 자리이며, 취병산은 현재 이인중학교 뒷산이다. 이인전투는 1894년 10월 23일 12시경 이인역 일대에서 벌어졌다. 성하영 휘하의 경리청 병사와 일본군이 이인역(利仁驛)에 도착하였을 때 동학농민군은 숲처럼 수많은 깃발을 꽂아두고 집결해있었다. 일본군과 성하영 관군이 동학농민군에게 기습공격을 가하였는데, 성하영 휘하의 관군은 이인역참 남쪽으로부터 총을 쏘며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이인역참 북쪽 산에 올라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긴 채 총을 쏘아댔다.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이인역참 건너편에 있는 취병산(翠屛山)으로 퇴각하였다. 취병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이 이인역을 점거한 일본군과 성하영 휘하 관군 쪽을 향해 계속해서 대포를 쏘면서 공격을 가하는 사이 날이 저물자 일본군과 관군은 이인역참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충청감영으로 회군하였다.



오실마을 전투지



오실마을 절골


• (절골) 충청남도 공주시 오곡동 산 119일대


  우금티전투 때 효포 쪽에서 들어오던 동학농민군 진격로 상에 있던 마을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관군 등 연합부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25일경의 효포에서 전투를 치룬 후 전열 재정비를 위해 논산으로 일시 후퇴하였다. 논산에서 2만여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자 곧바로 노성과 경천으로 진출하여 군량을 나르고 포대를 설치하면서 전투를 준비하였다. 이후 11월 8일 전열 재정비를 마친 동학농민군이 두 갈래로 나누어서 공주성 공격에 나섰다. 한 부대는 논산에서 고갯길을 넘어 곧장 오실산 옆길을 따라 이인 쪽에서 우금티를 공격하였고, 또 한 부대는 노성현 뒷산과 경천 쪽에서 판치와 효포를 공격하였다.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혁명군위령탑


•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327-2, 327-9, 329-6 일대

• 사적 제387호


  이 탑은 1973년 ‘동학혁명군위령탑건립위원회’에 의해 건립되었다. 1894년 9월 10일경 전라도 삼례 일대에 대도소를 마련하고 제2차 봉기를 위해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한 달 정도 뒤에 북상을 시작하여 10월 12일에는 논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농민군과 합류한 전봉준 장군은 10월 16일 박제순에게 반일항전에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띄웠다. 전봉준 장군 휘하 동학농민군은 북상하여 10월 22일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을 점령하였고, 북접에서 내려온 동학농민군은 공주 동쪽 30리 떨어진 대교(大橋)에 진을 쳤다.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은 각각 남쪽과 동쪽에서 공주를 협공하려했던 것이다. 이후 20여일에 걸쳐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 사이에는 공주감영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공주성을 둘러싼 최초의 전투는 1894년 10월 23일 이인에서 벌어졌다. 경천에 주둔하고 있던 전봉준 장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북접 동학농민군은 이인 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효포 쪽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이인역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이 10월 23일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50명과 성하영의 경리청 병력, 구완희가 이끄는 충청감영 병력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취병산까지 후퇴하였다. 그 이튿날인 10월 24일에는 대교(大橋)로 진격해있던 북접 동학농민군이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다.


  충청감사 박제순의 지원 요청을 받은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로 속속 집결하였고,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이 개시된 10월 24일 무렵 공주에 들어온 병력은 관군 810명, 일본군 2개 소대와 2개분대 약 120여 명이었다. 여기에 충청감영병과 민보군 등이 합세한 것으로 보인다. 우금티전투 때 일본군 지휘 하에 관군의 배치상황을 살펴보면 ①금학동 : 통위영 대관 오창성과 교장 박상길 ②능치 :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 대관 조병완·이상덕 ③효포 봉수대 : 통위영 영관 장용진과 대관 신창희 ④우금티 : 성하영, 백낙완, 영장 이기동 등이었다.


  우금티전투는 11월 8일 밤부터 시작되어 이튿날인 11월 9일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11월 9일 10시경부터 공주의 동쪽 판치 뒷산으로부터 서쪽 봉황산 기슭까지 약 3, 40리에 걸쳐 전선을 편 채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인에서 우금티와 오실 뒷산 두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한 동학농민군은 오후 8시경까지 일본군과 관군 등 연합부대를 상대로 4, 50여회 치열하게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우금티전투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전봉준은 전투의 참상에 대해 “2차례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點考)하니 남은 자는 3천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 후 또 2차례 접전한 후 점고하니 5백여 명에 불과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처럼 많은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공주 우금티 일대에는 농민군 집단매장지로 얘기되는 곳들이 많다. 곰나루 쪽에서 감영 뒤쪽으로 이어지는 ‘하고개’와 서쪽에서 공주로 진격하다가 희생된 농민군 시신이 널려있었다는 ‘송장배미’(현재 공주의료원 옆)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송장배미



송장배미, 기념비                                                                                   송장배미, 기념동상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247

• 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4호


  이곳은 우금티전투 당시 곰나루 쪽에서 봉황산 후면을 공격하다가 전사한 동학농민군이 묻힌 곳이다. ‘동학농민전쟁전적지 송장배미’라고 새겨진 기념비와 청동으로 기념상이 제작된 것은 2000년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가 추진한 환경정비 때이다. 현재 연못인 이곳은 갑오년 당시에는 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을 ‘송장배미’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주의 지형은 금강이 북쪽을 휘감고 있으며, 나머지 동·서·남쪽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공주로 들어가는 길은 삼면이 가파르고 좁은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공주가 갖는 특이한 지형 때문에 동학농민군을 5갈래의 길을 통해 공주를 공략하고자 했다. 진격로 첫 번째는 우금티, 두 번째는 효포에서 능티(곰티 혹은 웅치)를 넘는 길, 세 번째는 검상마을에서 새재를 넘어 일락산을 타고 공주로 내려오는 길, 네 번째는 곰나루에서 웅진동을 거쳐 하고개 또는 봉황산 뒤편을 통해 감영으로 들어오는 길, 다섯 번째는 주미산에서 우금티와 곰티 사이의 골짜기를 통해 공주로 들어오는 길이다.


  우금티가 공주의 인후(咽喉)에 해당한다면 곰나루에서 봉황산을 넘는 길은 목덜미에 해당한다. 그래서 봉황산을 넘는 길을 택한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장꾼으로 변장하여 하고개를 넘은 다음 공주를 기습적으로 공격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송장배미 부근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참고자료

• 「동학농민전쟁 연구」, 배항섭,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6.

• 『실록 동학농민혁명사』, 신순철·이진영, 서경문화사, 1998.

• 『東學 2 –해월의 고난과 역정』, 표영삼, 통나무, 2005.

• 『공주와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2005.

• 「公山剿匪記」,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9』,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현황조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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