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25주년과 역사학도의 소감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일본군의 1890년 대연습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1890년 3월 28일 아이치현에서 대규모 연습(演習)을 실시했다. 연습은 군대에서 “전투능력 평가를 위해 실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실시하는 군사 행동”을 말한다. 청일전쟁 4년 전에 벌인 전쟁연습이었다.
이미 1년 전에 ‘육해군 연합 대연습 조례’를 제정했다. 천황이 친림한 자리에서, 작전계획에 기초하여 공격과 방어를 전개하며, 대연습에서 나온 군령 등은 전시계획에 사용하고, 육군은 1개사단 이상, 해군은 1개 진수부 이상 기동연습에 동원하는 것이 요지였다. 4월 2일까지 5일 간 계속된 대연습의 작전계획은 도쿄를 포함한 중부 해안 일대를 포함하는데, 조선지도를 보면 서울에서 목포에 걸치는 넓은 구간이 작전지역이었다.
침략군으로 상정한 공격군은 강대한 함대를 보유한 2개국 연합군으로 제해권을 장악했다. 도쿄만으로 들어오는 이즈오섬(伊豆大島)과 이즈반도, 그리고 세토내해의 아와지섬과 와카야마로 상륙해서 도쿄 공략을 목표로 삼았다. 증원군은 지타반도로 상륙하여 나고야에서 합류하도록 계획했다. 핵심은 아이치현 일대에서 벌이는 결전이었다. 공격군의 함정은 일본 해군의 최신 전력을 망라했다. 상비함대의 다카치오와 후상을 비롯해서 나나와 등 쾌속 순양함들이 상륙지점을 공격했고, 히에 등 호송함과 사쓰마마루 등 운송선들이 속속 육군을 상륙시켰다.
육군은 오사카가 위수지역인 제4사단이 주력이었다. 사단장은 사쓰마번의 사무라이 출신인 다카시마 도모노스케(高島 鞆之助, 1844~1916) 중장. 근위사단 제3연대와 제4연대가 가세하고, 포병 1개중대가 지원했다. 방어군도 이에 상대할 만한 규모였다. 순양함 츠쿠시와 덴류, 수뢰정 아타고와 고타를 요지에 포진시켰다. 육군은 나고야가 위수지역인 제3사단이 방어의 주력이었다. 사단장은 에히메현의 고마쓰번 사무라이 출신인 구로가와 미치노리(黒川通軌, 1843~1903) 중장. 여기에 근위사단의 1개여단과 포병연대가 가세했다. 대연습은 함포사격 속에 방어군의 함대를 뚫고 공격군이 상륙한 후 4월 1일 한다촌(半田村)에서 대회전을 전개할 때 절정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2일 히라바리촌(平針村)에서 결전을 벌인 다음 종료되었다.
프러시아 전술 전략을 습득한 일본군
1890년의 대연습에 참가한 육군은 3개사단 규모였고, 해군은 쾌속 순양함과 어뢰정을 비롯한 호위함과 운송선 등이었다. 당시 병력의 절반이 아이치현에서 전쟁을 연습한 것이다. 일본 육군은 도쿄·센다이·나고야·오사카·히로시마·구마모토에 7개사단이 주둔했고, 해군 진수부는 도쿄만과 세토내해 그리고 규슈에 배치했다. 이런 군사력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벌어졌을 때 조선에서 청국군에서 밀려난 일본이 국력을 기울여 양성한 결과였다.
일본의 국정 목표는 조선 침략에 집중되었고, 구미의 근대식 군대체제와 무기 도입을 서둘렀다. 해군은 영국과 독일 조선소에서 함정을 건조하여 암스트롱포와 크루프포를 장착했다. 육군은 영국제 스나이더소총을 매입하고, 무라다소총을 개발해서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군사력 증강은 보불전쟁을 보고 방향을 확정했다. 보불전쟁은 프러시아 참모총장 몰트케(1800~1891) 장군이 지휘해서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은 전쟁이었다. 육군은 프랑스식 진대제를 개편해서 동원사단으로 전환했다. 육군대학은 독일군 장교 야콥 멕켈(Klemens Wilhelm Jacob Meckel, 1842~1906) 소좌를 교관으로 초빙해서 참모를 가르쳤다. 아이치현의 대연습은 메켈 학생들의 실습 훈련이었고, 그 졸업생들이 참모본부 휘하에서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참모본부의 전쟁 수행과 조선침략
독일식 전쟁은 작전계획에 따라 대병력을 집중하는 방식이었고, 통신·공병·병참·야전병원 등이 최대의 공격력을 발휘하도록 지원했다. 이 모든 계획의 기초가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었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정보장교를 조선과 청국에 보내서 군사기지·병력·무기를 비롯 정치와 경제 상황을 파악했다. 모든 군사 정보는 정밀 분석했고, 전쟁 도발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894년 청국이 파견한 국정 간섭자 원세개는 정세 파악에 어두웠고, 민씨정권은 극도의 무능·부정·부패를 드러냈다.
정부에 항거하는 조선 농민들의 움직임은 일본공사관과 정보장교가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했고,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일본 정부와 참모본부가 움직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최대 국가 목표였던 조선 침략은 1894년에 감행되었다. 바로 1890년 아이치현의 대연습은 전쟁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였다.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한 청일 간의 전쟁은 조선 내륙과 황해 바다, 그리고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서 벌인 아시아 최초의 근대식 해전과 육전이었다. 이 전쟁의 모든 계획은 참모본부가 사전에 준비했고, 선전전과 여론 오도, 그리고 역사 왜곡의 주체도 참모본부였다. 양국이 양무운동과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투입했던 패권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일본군은 소수 병력만으로 경복궁을 점거했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조선은 국제정치와 군사정보에서 깜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망국의 시련을 겪었다. 2019년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100주년이 지난 후 다시 25주년을 맞은 해이다. 세계 대세는 물론 동아시아 정세를 보지 못했던 맹목(盲目)과 같은 상황이 한국에 다시 나타난 해이기도 하다.
신영우 |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로 ‘갑오농민전쟁100주년추진위원회’(1989),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단체협의회, (재)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문체부 특수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등에서 기념사업에 참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