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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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봄 3호
통솔력이 뛰어났던 전라도 함평 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화진(李化鎭)’

  통솔력이 뛰어났던 전라도 함평 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화진(李化鎭)’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홍동현


  이화진은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손불면(孫佛面) 죽장리(竹長里) 당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주(公州) 이씨(李氏) 재명(載明)이다. 이화진의 본명은 경진(景鎭)이며, 호(號)는 평암(平庵), 화진(化辰)은 자(字)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엔 화삼(化三)이라는 가명(假名)을 사용하였다.


  이화진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자급이 가능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중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화진은 어릴 적부터 서당에 다니며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마을의 대소사를 도맡았다고 한다. 1894년 12월 체포 당시 관군측 기록에는 이화진을 함평군의 ‘괴수’ 또는 ‘거괴’였으며 전투에서 패한 뒤에도 그를 따르는 무리가 60여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4세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당시 무안 대월리 출신 배상옥(裵相玉)이 ‘함평무안접주’로서 그 세력이 손화중과 맞먹어 전봉준이나 김개남보다 더 컸다고 하는데 이화진도 그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꽤 큰 규모의 접조직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의 입도부터 지도자가 되기까지


  이화진이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최시형이 1888년 삼례와 전주 지역을 순례한 이후 전라도 지역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였는데, 이즈음 이화진도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화진의 형 언진(彦鎭), 그리고 사돈 사이인 장경삼(張京三), 장옥삼(張玉三, 이화진의 매부), 장공삼(張公三) 3형제와 이웃 마을 손불면 월천리 어전마을에 거주하는 임종량(林鐘良)도 이화진과 함께 뜻을 모아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들은 동갑계원으로 자주 왕래하며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서로 공유하는 가운데 동학입도에 뜻을 모았다고 한다. 통솔력이 뛰어난 이화진이 함평‘거괴(巨魁)’로서 이 지역 조직을 이끌었는데 함평지역 대성(大姓)인 함평 이씨로 고군산 첨사를 지낸 이태형(李泰亨)도 이들을 지원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다


  1894년 3월 20일 무장기포로 대대적인 무장봉기에 돌입하자 이화진은 자신의 휘하 조직원들을 이끌고 봉기에 가담하였다. 또한 전주화약 이후에도 괴치마을 앞 들녘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조직을 강화하고 있었다.


  한편 8월 17일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갑오정권을 앞세워 동학농민군에 대한 진압방침을 천명하였으며, 이에 맞서 전봉준을 비롯하여 동학농민군은 척왜거의(斥倭擧義)를 내세워 재봉기를 결의하였다. 9월 18일에는 최시형도 기포령을 내려 논산에 집결해 있던 전봉준의 본진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최시형의 북접과 전봉준의 남접이 연합하여 일본의 침략에 맞선 대대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하였다.


  10월 말부터 공주 지역에서 전개된 치열한 공방전에 이화진을 비롯한 함평 동학농민군도 함께 참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가 11월에 있었던 나주 공방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아마도 후방 수성을 위해 북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에서의 마지막 전투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전개된 공주공방전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논산, 전주로 후퇴하면서 토벌대의 추격을 받았으며, 태인전투 패배를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흩어진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최경선과 손화중 진영으로 몰려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마침내 11월 말 광주, 나주, 함평 농민군과 무안, 해남, 영암, 진도, 강진, 장흥 지역 동학농민군은 나주를 가운데 두고 양면으로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때 이화진도 휘하 조직을 이끌고 대접주인 배상옥을 찾아가 합류하였다. 마침내 11월 17일 무렵 배상옥과 함께 나주로 향하던 중 고막원 일대에서 정석진이 이끄는 수성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동학농민군과 수성군 간 치고받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포대와 천보대 등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수성군에 동학농민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승세를 잡은 수성군은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살상하였다. 이때 상황을 목격한 어느 유생은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며 그 처절함을 기록하고 있다. 이화진 또한 겨우 살아남은 60여명의 휘하 부하들을 이끌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12월 초 끝내 수성군에 체포되어 다음 날 부하 9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비극적 사연


  하지만 이화진 집안의 불행은 그의 죽음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형 언진 또한 수성군에 체포되어 사살되었으며, 부친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다시피한 것이다. 때문에 족보에는 3분의 기일(忌日)이 모두 12월 4일로 적혀 있다. 다행히 그의 아들 영복(永福, 당시 17세)은 수성군의 수색을 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영복은 부친의 시신을 찾고자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참이 지난 뒤 마을 앞산인 내당산에 가묘를 두었다고 한다.



  관련 자료

「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所捉什物幷錄成冊」(「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 8)

「巡撫使先鋒鎭謄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 14)

「先鋒陣呈報牒」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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