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 역사 바로알기’는 동학농민혁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학농민혁명 관련 용어나 사건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코너로 매회 주제를 달리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마련하였다.<편집자 주>
동학(東學)과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일반적으로 동학(東學)과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혼용해서 쓰고 있다. 그러나 글자가 다른 만큼 두 단어사이에는 상당한 의미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명확한 구분과 단어의 의미와 함축된 의미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이에 따라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하여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東學)
동학(東學)은 글자의 의미로 보면 동쪽의 학문이다. 이는 서학(西學) 즉 서쪽의 학문에 대칭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학은 당시 조선에서는 서쪽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인식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학은 19세기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서쪽의 학문 또는 서쪽의 사상에 대응해서 조선이라는 공간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조선은 통치질서가 와해되고 농민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졌으며 서양의 침략위협에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농민들은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그리고 자주적인 종교가 창도되었다. 1860년 경주에서 최제우가 유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교, 불교, 도교의 장점을 합하여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다.
동학은 ‘사람이 하늘이다(人乃天)’ 이라는 인간평등사상과 새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학에 입도하여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 시천주(侍天主)를 이룰 수 있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천운(天運)에 순종하고 천도(天道)에 합치하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조화롭고 정의로운 새 세상,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동학이 창도되자마자 조선의 농민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경상도 일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동학을 체제를 위협하는 학문으로 지목한 조선정부는 1863년 12월 최제우를 체포하여 1864년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 ; 사악한 도로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 의 죄목으로 처형하고 그의 제자들을 유배 보냄에 따라 동학은 조선에서 불법이 되었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교단의 실질적 지도자가 된 최시형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강원도 깊숙한 곳으로 숨어 들어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祭儀)와 조직을 정비하는 등 동학교단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1880년대 동학의 교세가 확대되어 충청도 및 전라도 일대에서 급격하게 동학도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동학의 교리와 조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기본적 토양이 되었다.
따라서 동학은 사상이자 종교라고 규정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년 동안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3월 1차 봉기, 집강소 시기, 9월 2차 봉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894년 3월 1차 봉기 이전에 일어난 고부 농민봉기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내고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던 사건이 고부농민봉기이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못하였다.
1894년 3월 1차 봉기는 전라도 무장에서 시작되었다. 3월 20일 전면적으로 봉기를 선언한 동학농민군은 무장에서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하고 진격하여 3월 25일에는 백산(白山)으로 이동하여 각지에서 참가한 농민군으로 진영을 확대 개편하였다. 이후 4월 7일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였고, 4월 23일에는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격파하였다.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였으며 5월 7일 경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였다.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기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27개조)을 단행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농민 자치활동을 실행하였다.
한편,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봉준 등 농민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2차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전봉준은 9월 초부터 삼례를 거점으로 하여 동학농민군을 재조직하고 10월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을 시작했다. 특히 1차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제2대 동학교주 최시형의 봉기 선언에 따라 손병희와 동학 상층 지도자들이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10월 15일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하였다.
이들 동학농민남북접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고,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선전 분투했지만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년동안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은 우금치를 넘지는 못했지만 그 정신은 항일의병운동, 3·1 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졌으며 궁극적으로는 한국근현대사의 방향을 결정지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상에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 이 두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정리해 보면 “동학은 사상이자 종교이며, 동학농민혁명은 사건이자 역사이다.” 으로 규정할수 있다. 앞으로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고 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