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신의 핏속에 흐르는 동학
강경호 (시인, 문학평론가)
나와 동학혁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저 어린 날 역사책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의해 일어난 민중봉기’ 정도의 역사적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어느 틈엔가 내 의식을 적시며 흘렀던 강물이 동학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학시절 나는 교지 편집장을 맡아 일을 했다. 이른바 기획특집으로 동학의 현장인 ‘황룡강’ 과 ‘황토재’ 를 찾아 취재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는 좀 의식이 있는 학생들이 다산 정약용이나 정암 조광조 선생 등 봉건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역사인물에 대해 관심을 드러내는 지적 호기심의 발로였다. 나 역시 어찌보면 치기나 객기 같은 생각으로 동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위해 구체적으로 농민들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외쳤던 ‘반봉건 반외세’ 는 외세에 들러싸여 있는 오늘의 현실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후 오늘날까지 나의 정신세계 속에서 가장 크게 자리잡은 것은 ‘근대’ 라는 낱말이다. 물론 ‘탈근대’ 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동학이 추구했던 ‘근대정신’ 을 여전히 지향한다. ‘반봉건’ 의 대척점에 있는 ‘근대’는 삶의 주체가 바로 ‘나’ 여야 한다. 그런데 동학은 노비의 발목에 채웠던 신분의 족쇄를 풀고 신분제를 폐지할 것을 농민들은 주장했으니 근대정신과 만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기본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학정신은 내 의식을 끊임없이 깨우며 나의 시(詩)와 평론(評論)의 밑바닥에 달라붙어 죽비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살며시 타이르기도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동학의 최대 격전지인 석대들이 있는 장흥을 자주 출입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군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전투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농민군의 규모가 3만명이 되고 농민군과 관군의 사망자가 2천명이 넘는 동학 최후의 전투였다.
장흥 석대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부터 장흥출신 소설가 송기숙 선생님이 동학에 관심을 깊이 가졌다. 그래서 마침내 송기숙 선생님은 12권의 『녹두장군』을 완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장흥군에서는 해마다 석대들 동학전적비 앞에서 농민군을 추모하는 행사를 치른다. 장흥과 인연이 깊은 나는 그 자리에 출입하게 되었고, 장흥 동학과 관련한 책들을 편찬하는 데 힘을 모으기도 했다.
몇 해 전에는 송기숙 선생님이 개정판 『녹두장군』을 보내와 120여년 전 이 땅에 뜨겁게 타올랐던 ‘반봉건, 반외세’ 의 함성의 전모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함성이 어쩐지 오늘 우리가 내지르는 소리로 들려오는 것이다.
나와 동학과의 혈연적 인연은 결혼과 함께였다. 아내의 외증조부 형제들이 당시 화순지역 동학군의 자금책이었다고 한다. 고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집안이었는데,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불안한 농민들 편에 서서 체제와 싸우는 길을 택했으니 실로 용기있고 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사실적인 실체의 동학을 나는 교과서에서만 배운 피상적인 동학을 아내를 통해 만났으니 나와 동학의 만남은 아주 실감나는 것이었다.
아내의 외증조부는 수배의 눈초리를 피해다니며 은거하다가 끝내 병이 들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처지이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은 아내의 외가에 지난 100여년 동안 춥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집에는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 이 날마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눈을 부릅뜬 장군의 모습에서 얼굴도 모르는 아내의 외증조부의 모습을 읽어내어 본다. 내 아이들도 외가의 피를 이어받아 동학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이들은 그것이 자랑스러운가 보다. 그리고 자긍심 있는지 동학을 이야기할 때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생각해 보니 나와 동학은 비켜간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동학은 나의 피와 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 소개>
ㆍ1958년 전남 함평 출생
ㆍ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석사) 졸업
ㆍ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ㆍ1997년 월간 [현대시학] 등단
ㆍ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ㆍ시집 <언제나 그리운 메아리>
ㆍ시집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사람>
ㆍ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