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접 농민군의 경로가 밝혀지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 개최 -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즈음, 동학농민혁명이 더 이상 한국 내부만의 사건이 아닌, 일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세계를 뒤 흔든 사건이었다는 점에서는 더 이상 이견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100주년 기념연구가 대부분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추출하는 데 주력하였다면, 이제는 시야를 넓혀 19세기말 당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이 동아시아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게 되었다. 우리 재단 출범 후 처음으로 개최한 금번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동아시아 세계를 생각하기에 앞서 ―
기존 연구들이 지니고 있던 문제점 중의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한국사에서 내재적 발전을 추출하고자 한 나머지, 동학 내지 동학교단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동학농민군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학교단 중심의 북접 농민군의 실상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신영우 교수(충북대)의 발표를 주목해 볼 만하다. 신 교수는 새롭게 발견한 사료인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을 통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894년 9월 18일 기포령 이후 북접농민군의 여정과 해월 최시형의 구체적인 행적을 밝혀내었다. 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만이 아닌, 북접 농민군의 비중을 재조명할 여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군의 침략상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 측의 활동에 대해서는 모처럼 한국, 일본의 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었다. 한국 측 발표자로는 이이화 전 이사장(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일본 측 발표자로는 나카츠카 아키라 명예교수(나라여자대학), 이노우에 가츠오 명예교수(훗카이도대학)가 나섰는데, 이들은 모두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침략상을 규탄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이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과정에서 드러나는 근대적 대량 학살의 기원이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전봉준의 사진을 둘러싼 진실을 밝힌 발표가 있어 주목된다. 발표문을 제출한 김문자 선생(나라여자대)은 그동안 정확한 촬영 일시와 장소, 촬영자 등이 알려지지 않았던 ‘전봉준 압송 사진’을 둘러싼 진실을 밝혀내었다.
그는 이 사진을 두고 무라카미 텐신이라는 일본 사진작가가 1895년 2월 27일 전봉준이 서울의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법무아문으로 인도되는 장면을 찍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라카미 텐신이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큰 기여를 한 사진사였던 만큼 전봉준 촬영 역시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하였다. 그가 밝힌 위와 같은 사실은 기존 이 사진을 두고 서울로 압송당하는 모습, 혹은 재판 과정에서 찍힌 모습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었던 만큼 앞으로도 많은 논란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중국의 역할에 대한 한·중 연구자들의 시각 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중국, 즉 당시의 청국은 처음에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곧이어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에서 조기에 패하였기 때문에 동학농민군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을 직접 탄압하였던 일본군에 비해 청군에 비중을 둔 연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김준 연구원(청화대학)은 발표를 통하여 청군이 동학농민군 진압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학농민군의 적이었던 일본군과 싸웠음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일본군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동학농민군과 청군의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러나 김 연구원의 주장에 대하여 토론을 맡은 구선희 편사연구관(국사편찬위원회)은 청군이 조선 측에 피해를 입힌 점을 예로 들면서 중국의 침략상을 강조하여 시각 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자료제공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
